박현구 시인 / 봄빛 유예猶豫
출생신고를 연둣빛으로 해야겠다 분홍이 제가 먼저라면 어쩔 수 없지 며칠 전 폭설에 무릎이 시리게 묻히더니 흰 바탕에 그어진 검은 빛 도로가 겨울을 마감처럼 녹였고 나는 새싹 틔울 준비를 서둘렀다 얇은 막이 씌어 진 시야가 환한 남쪽 하늘을 머금자 내 어깨의 봄빛을 누르며 남아있는 겨울이 춥게 수군거렸다 우주에는 에너지보존법칙이 있어 눈은 북쪽에서 온다며 호흡 한 번 멈추고 주변을 보라고 했다 막 지난 소한小寒이 저만치서 웃고 있었다 아직은 겨울의 한가운데서 검은 선을 가르는 자동차가 깔깔대고 밝은 기운이 봄볕처럼 따뜻하다 성미 급한 내가 그대 마음속에 어떤 해후로 들어가고 싶었던 거다
박현구 시인 / 부유물(浮遊物), 그리고
흘러드는 개천 위로 보(洑)가 안은 물에서 잠자리채가 바쁘다
날들이 시든다 죽음처럼 침묵이 찾아오면 버려지는 것들이 있다 나뭇잎, 풀잎, 꽃잎들, 그리고 도무지 과거를 알 수 없는 썩은 것들이다 개흙처럼 고인다 사랑은 늙고 정은 스러지는데 꽃눈깨비 손 끝에 무겁고 웅덩이의 너겁이 넝마처럼 어지럽다
흙비가 걷힌다 뽀얀 하늘이 어머니 속살처럼 가깝다 바위 아래 먹그림 같은 나무들 구름 밀치자 푸르름이 새삼스럽다 솔가리 내린 땅거죽 떠들고 기척하는 송이松栮다 한겨울에 핀 매화를 본다 뙤약볕 아래 맨드라미의 시들지 않는 사랑도 불처럼 뜨겁다
떠 있던 시절도 가라앉은 옛일도 있었다 햇발처럼 빛나던 것들이다 잊혀진 여인의 얼굴처럼 말간 물에 비췻빛 하늘이 환하다
박현구 시인 / 그렇게 살았다-3 ㅡ개성댁
개성댁은 미인이다 날씬하고 날렵하다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 또렷하다 지나치게 이성적이라 정이 없는 듯한데 매사가 깔끔하다 쌀쌀맞다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피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하숙집 주인 개성댁은 초인(超人)이다 열여섯 하숙생을 혼자서 치러낸다 단정히 쪽 찐 머리에 치마저고리 단단히 차려입고 허리 질끈 동여맨 모습에서 바람이 인다 개성상인 유전자가 물려 내렸는지 분명하고 재바른 깍쟁이가 된 건 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여학교를 나와 부유한 토호의 자식이던 어느 시인에게 빠져 결혼했는데 삶은 현실이라 먹고살기 바빴다 하나뿐인 키다리 딸은 여학교 영어 선생을 하였는데 하숙생들이‘돛대 이모’라 불렀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노처녀 돛대는 뒤늦게 생리학인지 생물학인지 박사 남편 만나 출가했다
시인은 무능했다 언제나 술에 절어 코가 빨갰다 잘난 게 무엇인지 꼬부라진 혀로 ‘죽일 년 목을 벨 년’이라며 손날을 휘둘렀다 개성댁은 ‘내 눈 내가 찔렀다’고 혼잣말하였다
이만 날이나 넘는 세월 흘러 개성댁도 시인도 진토(塵土) 되었는데,
꼬불꼬불하던 산비탈 가풀막은 옛 모습 간 데 없고 반듯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 터에 무능했던 시인의 시비(詩碑)만 남아 오가는 이들에게 소주잔 권하며 부득부득 할 말한다 나는 곰이로소이다
찬바람 맞으며 뒤돌아보니, 다들 그렇게 살았다 힘들게들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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