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주 시인 / 둘레 길에서
제주도 해안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뜨거웠다 어느 시절에 식어버린 까만 현무암 그 돌 틈 사이에 뿌리를 두고 바람을 흔들고 있는 작은 손을 보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마음일까, 몸을 필사적으로 흔들게 하는 이유
그 사이에 바람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바람만큼 매서운 칼날이 있을까 유연함으로 바람에 뿌리를 내리고 씨를 뿌리고
몇 년을 견뎌내고 배웠을 그 무엇 바람을 막는 방법
다시 우린 해가 지는 방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권은주 시인 / 4월 16일
그러고 보니 모든 거짓들은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끙끙거리다가 예기치 않은 아침에 깨어난다
아침,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 순간 진동이 감지되더니 거실에 있던 브라운관이 그녀를 안고 바다 속으로 넘어졌다
안전지대는 없다 안전제일이라고 쓴 표지판 바로 아래 블랙홀 깨달았을 땐 늦은 거야
소용돌이치던 거센 물살이 그녀와 브라운관을 안고 들어가 버렸다 미처 일어나지 못한 귓속으로 모래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래알들은 심하게 서걱거렸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작은 귀가 몸의 평행을 담당해온 거야
현기증으로 이미 바로 설 수가 없어……
그녀가 사라진 거실의 붉은 벽 맞닿아 있었던 벽면 서로 먹히고 먹던 선명한 이빨자국
브라운관은 블랙아웃
-시인정신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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