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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은주 시인 / 둘레 길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6.

권은주 시인 / 둘레 길에서

 

 

제주도 해안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뜨거웠다 어느 시절에 식어버린

까만 현무암

그 돌 틈 사이에

뿌리를 두고

바람을 흔들고 있는 작은 손을 보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마음일까,

몸을 필사적으로 흔들게 하는 이유

 

그 사이에

바람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바람만큼 매서운 칼날이 있을까

유연함으로

바람에

뿌리를 내리고

씨를 뿌리고

 

몇 년을 견뎌내고 배웠을

그 무엇

바람을 막는 방법

 

다시

우린

해가 지는 방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권은주 시인 / 4월 16일

 

 

그러고 보니 모든 거짓들은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끙끙거리다가

예기치 않은 아침에 깨어난다

 

아침,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

순간 진동이 감지되더니 거실에 있던 브라운관이

그녀를 안고

바다 속으로 넘어졌다

 

안전지대는 없다

안전제일이라고 쓴 표지판 바로 아래 블랙홀

깨달았을 땐 늦은 거야

 

소용돌이치던

거센 물살이 그녀와 브라운관을 안고 들어가 버렸다

미처 일어나지 못한

귓속으로 모래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래알들은 심하게 서걱거렸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작은 귀가 몸의 평행을 담당해온 거야

 

현기증으로

이미 바로 설 수가 없어……

 

그녀가 사라진 거실의

붉은 벽

맞닿아 있었던 벽면

서로 먹히고 먹던 선명한 이빨자국

 

브라운관은 블랙아웃

 

-시인정신 2014년 가을호

 

 


 

권은주 시인

1967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