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숙 시인 / 진수성찬
거실 식탁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뚜껑도 덮지않고 밥상이 따끈하다 햇빛 밥 한 그릇 햇빛 미역국 햇빛 나물과 햇빛 겉절이 햇빛 동그랑땡 버무리고 무쳐놓은 햇빛에 황석어젓갈을 쓰고 민들레꽃기름을 쳤구나 누에가루로 간을 맞추었구나 수저 한 가득 늦은 햇빛을 뜬다 미역국은 낳아준 사람이 먹는다는 말 잊지않고 엄마처럼 오래 씹어 먹는다 행운목에도 한 입 꽃잎 벽지에도 한 입 디저트로 수화기에 따라온 바람을 찻물에 타서 마신다 식탁 위에 한 상 차려진 햇빛을 되새김해 오래오래 씹어 먹는다
-2009 현대시학 9월호에서-
심인숙 시인 / 골목
무수히 많은 국숫발이 흔들린다 빗금 친 그 사이로 가늘고 긴 햇살이 굽이굽이 신기루 속 골목을 열고 있다 하얀 그림자가 담과 모퉁이 사이를 돌아나갈 때, 나지막한 공장의 판자지붕, 몇 몇 살아남은 무궁화나무와 붙박인 낮달, 멈출 것 같지 않은 기계소리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파르스름한 철대문은 먼지 속 나팔꽃에 반쯤 기울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은 마음의 풍경뿐이다 바람은 느리고 들여다보면 햇볕 속에 대숲 하나 보인다 더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허리 굽은 노인도 나타난다 할머니, 거기 계세요? 불쑥 도둑괭이라도 튀어나올만한 호젓한 이곳에는 아직도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이는 남고 부지깽이를 쥐고 있던 증조할머니는 없다 누군가 틀어놓은 노랫가락이 흩날리다 툭 툭 끊어지는 골목, 일렁이는 대숲을 헤치는 것이 바람인지 나인지 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얀 골목 어귀, 굽이치는 국숫발마다 둥근 햇빛이 미끄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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