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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인숙 시인 / 진수성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6.

심인숙 시인 / 진수성찬

 

 

거실 식탁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뚜껑도 덮지않고 밥상이 따끈하다

햇빛 밥 한 그릇

햇빛 미역국

햇빛 나물과 햇빛 겉절이

햇빛 동그랑땡

버무리고 무쳐놓은 햇빛에

황석어젓갈을 쓰고

민들레꽃기름을 쳤구나

누에가루로 간을 맞추었구나

수저 한 가득 늦은 햇빛을 뜬다

미역국은 낳아준 사람이 먹는다는 말

잊지않고

엄마처럼 오래 씹어 먹는다

행운목에도 한 입

꽃잎 벽지에도 한 입

디저트로 수화기에 따라온 바람을

찻물에 타서 마신다

식탁 위에 한 상 차려진 햇빛을

되새김해

오래오래 씹어 먹는다

 

-2009 현대시학 9월호에서-

 

 


 

 

심인숙 시인 / 골목

 

 

무수히 많은 국숫발이 흔들린다

빗금 친 그 사이로 가늘고 긴 햇살이 굽이굽이 신기루 속 골목을 열고 있다

하얀 그림자가 담과 모퉁이 사이를 돌아나갈 때, 나지막한 공장의 판자지붕,

몇 몇 살아남은 무궁화나무와 붙박인 낮달,

멈출 것 같지 않은 기계소리가 탈탈거리며 지나가고 파르스름한 철대문은

먼지 속 나팔꽃에 반쯤 기울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은 마음의 풍경뿐이다

바람은 느리고 들여다보면 햇볕 속에 대숲 하나 보인다

더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허리 굽은 노인도 나타난다

할머니, 거기 계세요?

불쑥 도둑괭이라도 튀어나올만한 호젓한 이곳에는

아직도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이는 남고 부지깽이를 쥐고 있던 증조할머니는 없다

누군가 틀어놓은 노랫가락이 흩날리다 툭 툭 끊어지는 골목,

일렁이는 대숲을 헤치는 것이 바람인지 나인지 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얀 골목 어귀,

굽이치는 국숫발마다 둥근 햇빛이 미끄러지고 있다

 

 


 

심인숙(沈仁淑) 시인

1957년 인천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졸업.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숭어' 당선, 2006년  ≪문학사상≫ 시부문 [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파랑도에 빠지다』(푸른사상,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