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선 시인 / 옷장 속 남녀
겨자 빛 그믐달에 톡 쏘인 멍게 같은 구름이 두어 개 지나가고 바깥이 궁금할 일 없는 남자는 옷장에 붙여둔 그림과 한나절 이야기 나누다 척추에 좋은 자세를 연구 한다 철제 바구니 안에 등 말고 앉았다가 팔 다리 접고 서랍 속에 개켜져 있더니 세탁소 로고가 박힌 비닐 속에 어깨 늘어뜨리고 옷걸이에 걸려있다 천장을 보고 누워 두 팔은 양쪽 골반 옆에 가지런히 모은 발끝은 품위를 유지하고 어떤 소리가 들려도 눈을 뜨면 안된다 아랫배에서 길어 올린 숨을 세 번 내쉬고 주문을 외운다 낙타머리,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목, 조개의 배, 잉어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발바닥 손바닥을 두 번 마주치며 합체, 합체 ……. 어김없는 용(龍)의 조합이다 초파리도 한숨 돌리는 느긋한 저녁 남자를 임대받은 여자의 잇속을 내보이는 소리 박하향처럼 올라온다 “당신 임대기간이 얼마나 남았죠?” 집게손에 매달린 남자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사이 옷장에서 동거하던 다듬이 벌레와 자충들이 먼저 나가고 남자는 숨소리에서 좀약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삼거리 병원 앞 히물히물 웃는 아내의 얼굴이 보이는 풍경에 “사람을 임대합니다.” 현수막이 펄럭인다 제습제를 겹쳐 베고 꼼짝 않는 연습을 하다 임대계약 해지 통보 받은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부는 삭일(朔日) 말미잘 같은 여자가 옷장에 들어갔다 등을 꼿꼿이 펴고 양손을 내밀어 박수치기 두 번 짝짝 前 기러기, 後 기린, 뱀의 목, 물고기 꼬리, 황새 이마, 원앙 깃털, 닭 부리
봉(鳳)이든 황(凰)이든 되려고 …….
임희선 시인 / 물고기 모빌이 흔들리는 저녁
계량컵으로 정확히 덜어낸 2인분을 쌀바가지에 담고 몸서리가 그릇표면을 돌아 손가락 사이로 뿌연 울음을 토해 놓을 때까지 여자는 바락바락 아이를 비벼 씻는다
눈 떨어져나간 아이가 퉁퉁 불어 하얗게 쓰러질 때까지 가라앉히고 문지르고 따라내고 헹궈 무거운 솥에 안치고 자리를 뜬다
무늬목 롤탑테이블, 밝은 색 네이티브 무늬 방수보 여자의 엉덩이를 닮은 사기볼, 디스플레이 모형 과일 유리병 속 싱그럽고 철없는 조화
오빠! 엄마는 피린계, 시린계 약물 알러지가 있어 “티융”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놓아버리자 여자의 왼쪽 뺨에 박히는 화살촉에 움찔 다트 판이 잠깐 허리를 뒤튼다
아스피린 한 알이면 그만이야 노란 고무줄을 발목에 걸고 한 번 꼬아 발가락에 끼우면 총알처럼 빨리 달아날 수 있대
실은 엄마의 기능성 속옷을 전부 훔쳤어 저녁쌀을 씻을 때마다 쌀뜨물처럼 가슴이 뽀얗게 불어 점점 커지고 있거든
압력밥솥 꼭지가 그로테스크한 회전을 시작한다 피루엣. 피루엣. 피루엣.
당신, 잠깐 거울 밖으로 나올래? 여자의 입에 하얀 거품이 인다 나는 엄마 역할을 아주 잘 해내고 있어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주고 있지 문제는 저 아이가 침대 밑에 말아놓은 ‘오빠’라는 녀석이야
곧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이야 따뜻한 저녁밥은 할 만큼 한 엄마의 표상이래
“잠시 후, 증기배출이 시작 됩니다” 해리성 압력을 풀고 밥솥이 고슬고슬한 속내를 드러낸다
오빠, 잠깐만 베갯잇에 들어가 있어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이야 엄마랑 맛있게 밥 먹고 돌아올게
정확히 2인분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위에 펀치로 눈을 뚫어준 벙어리 물고기 모빌이 환기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스타턴을 한다 스핀, 스핀, 스핀,
* 피루엣 : 발레에서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춤 동작. * 스타턴 : 나비턴이라고도 하는 벨리 댄스의 턴 동작으로 360도 몸통을 틀어서 도는 동작
임희선 시인 / 비 오는 날 커피는 가구 우려낸 맛이다
아버지는 울음주머니를 풍선처럼 부풀렸다
産卵하기 좋은 솜이불 속에 몸을 묻고 허파의 공기를 끌어올려 개신개신 계- 골 계-골 계골계 골계 골계 골계
더 크게 더어 크게 우셔야죠, 아버지 귓속에 가득 찬 고름 같은 고물들 빗속에 쏟아지게 사타구니 밑을 털어 감춰둔 개구리들 화음 맞춰 크게 크게
와일드비스트, 누, 지브라, 워터벅 단내 맡은 짐승들 온종일 귓속에서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20년 떡집 일꾼 어머니는 후천성무통각증 환자 단물 다 닳은 나른한 껌을 통점에 붙이고 툭하면 허리를 꺾었다 복숭아씨 같은 뼈 통, 통, 통 빗속을 구른다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팥고물, 계피고물, 콩고물이 우루루 쏟아지고 뜨거운 심장을 절편처럼 뚝, 뚝 끊어내도 아파하는 법을 잊었다
-이보게~ 아프면 울게 -어이 나처럼 말여 쌀가루 같은 아버지 울음을 군말 없이 백설기로 쪄내고 네모 하얗게 김 서린 반듯한 아버지 이마 테이블과 텔레비전 티백을 티포트에 넣고 우려 마신다
어머니 꺾인 허리 틈에서 자란 싹으로 아버지가 꽃꽂이를 한다 풀썩 반으로 접힌 어머니
새벽, 꽉 차 오른 요의 때문에 빈 아스팔트에 비가 튀자 웅덩이 속에서 공기놀이 하던 아버지는 빗소리를 모아 긴 한숨으로 매듭지어 안테나에 매어놓고 쪼그려 뛰기를 시작한다 탈, 탈, 탈 사타구니 밑에서 개구리들이 튄다
-이보게들~ 구슬프게들 울게 어이? -나처럼 말여, 이렇게 -계- 골계골계골계 滑稽 滑稽 滑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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