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 시인 / 일생
하려던 복수도 떠나버리고 그토록 다르던 너희들과 함께 같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는 것도 상관없는 또 알뜰히 지워지는 하룻잠을 당신에게 청하여본다 심각한 얼굴은 마라 말도 말아라 꿈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심야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래놓고도 울리는 벨소리가 핏줄처럼 질긴 건 못할 복수로나마 나를 청하는 걸 안다 나를 기다리다 너희들이 되고 너희들은 있지도 않은 나를 요청하여 누구로서도 풀지 못할 사나운 꿈자리가 되는 걸 안다 그래 알기를 원했던 건 오직 내가 올 것인가 와서 너희들과 더불어 지금 없는 나를 낳아주는 거였다 당신이 나를 놓아주는 거였다 일생이 다 떠나버리고 문설주에 기대 앉은 먼지에게 나를 입혀주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하지 못한 일생 동안의 복수를 당신의 이름으로 사하여주는 것이었다 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생
이윤설 시인 / 예약된 마지막 환자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휘날리는 필기가 끝나고 마침내 새 처방이 나왔다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합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직업이나 식사 무엇 하나 규칙이긴 힘든데다 고독한 처지예요 더구나 시는 읽을 줄 몰라요
건강을 돌보라는 간단한 충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군 그는 깨진 유리처럼 인상을 쓰고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간호사가 황급히 물잔과 알약을 대령하자 약을 털어 삼키는 동안 시꺼멓게 반달진 그의 눈 밑이 엿보였다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이 자신의 세포를 적으로 오인하고 스스로를 공격하여 생기는 통증이지요 나는 환자들을 내 몸처럼 여겨요 그런데 왜! 처음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으달달 떨며 폭죽처럼 실핏줄이 터졌다
선생님, 통증이 심하신가요?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복용하셨나요? 그는 그건 이미 십 년 전 일이라고 못박았다 나는,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는 직업상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나는 내 말을 믿지 않는 환자는 진찰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간호사에게 외쳤다 다음 환자! 그는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건 채 훌쩍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간호사는 그가 예약된 마지막 환자였다고 말했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희선 시인 / 옷장 속 남녀 외 1편 (0) | 2023.05.16 |
---|---|
송승환 시인 / 드라이아이스 외 2편 (0) | 2023.05.16 |
황외순 시인 / 소금 외 2편 (0) | 2023.05.16 |
김순옥 시인 / 여우창문 외 2편 (0) | 2023.05.16 |
조윤희 시인(장흥) / 화양연화 외 1편 (0) | 2023.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