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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순옥 시인 / 여우창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6.

김순옥 시인 / 여우창문

 

얼굴이 하얘, 라고 말하는 소년을 만났다

도화를 따서 이건 밥이야

찧어서 녹색 물이 흐르는 이건 반찬이야

너는 해를 가린 손가락의 말간 비밀을

나직이 말했다

맑은 물소리가 포개지고 종소리가 들렸다

노을이 납작한 돌멩이를 들어 꽃밥처럼 물들였다

엄마와 아빠가 될까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몰라

얼굴 절반이 먼지처럼 떠올라 구름으로 지나갔다

천천히 잊힐 일이 자꾸만 돋는 마당

내려앉은 유월을 갸우뚱거리며 보는 햇빛

한바탕 소란이 뜨거운 여름을 부려 놓던 날들

지나간 밤이 찾아와 다시 새벽 세 시

꺼내 놓은 발자국 속으로 빗물이 고인다

마지막이라며 울던 우산이 오늘도 울고 있다

복숭아 꽃잎이 묻어 들었다

도화는 후르르 피어 사흘, 우르르 날려 또 사흘을 말라 간다

곳곳마다 얼굴, 묻지 않을 것에 대해 생각한다

마름모꼴 창을 빗방울이 핥을 때면 소년의 흰 치아들이 흘러내린다

이 웃음은 어루만질 수 없다

 

 


김순옥 시인 / 불구하고

 

검은 개는 새벽부터 방문을 긁고 있다.

빗금투성이가 된 너,

식탁 위에 놓을 새 꽃병을 사고 서늘한 여름을 꽂는다. 이제 개는 꽃으로 변하겠지.

앞발로 손등을 긁고

빠져나온 발톱을 드러내며 휩쓸다 간 밤. 그때부터 멈춘.

외출용 가방은 문고리에 걸어 놓고

침침한 식탁 밑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는다.

발가락에 붙은 아홉 개의 생각이 떠 있다. 때로는 진눈깨비로 때로는 비로 내렸던.

하얗게 부푸는 오늘과 더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어제가 물먹은 밥풀 같다.

무수한 감정들이 비에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들러붙는다.

여기 버스가 지나갔습니까?

나의 안부를 묻는 당신, 당신의 안부를 묻는 나, 그 너머.

창문에 바짝 귀를 대고 보는 방향.

꺽인 당신이 보인다.

밤새 퍼마신 술의 기운을 빈 검은 개. 또,

방문을 긁는다.


 

 

김순옥 시인 / 배역

 

 배역을 바꾼다는 설익은 무화과를 땄다. 함께한 많은 금단 증상이 아름다웠다. 으르렁대는 늑대의 목에서 피어있는 꽃. 창문을 열면 우르르 새들의 이야기가 떨어졌다. 꺾었다는 것과 땄다는 것으로 구구절절한 두 시 반. 감히 배역을 바꾼다는 물고기는 황소로 전갈로 사자로, 끊임없이 배역을 바꾸는 그림자가 모퉁이에서 캥거루로 서성이고, 모퉁이는 고양이가 되고, 뒷자리로 물러나

 다시 그림자. 그러거나 말거나 우주는 가장 어려운 배역. 어디를 보든 수십억의 벌레들이 들끓는 밤이 쏟아진다는 설익어야 가능한 무화과. 두리번거리는 동안을 생이라 부르고 커튼 너머를 두려워한다. 마지막엔 커튼의 역을 맡게 될 것이므로.

 

 


 

김순옥 시인

경북 선산에서 출생. 2017년 《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