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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세훈 시인 / 봄꽃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5.

정세훈 시인 / 봄꽃

 

 

보송보송한 땅에서만 살아간다면

봄꽆이 아니지

따뜻한 곳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때로는 꽁꽁 얼어붙기도 하고

때로는 겨울 찬바람 불기도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

그런 곳에서 피는 거지

겨울이 지났다고

혼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봄꽃이 아니지

메마른 들녘 여기저기

서로서로 더불어

한마음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거지

봄이 왔다고 마냥 피어 있는 것은

봄꽃이 아니지

천지에 푸른 들녘

포근히 깔아 놓고서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정세훈 시인 / 저 헌 기계 울고 있네

 

 

이 한밤 새고 나면

폐기처분이 될

노후될대로 노후된

저 헌 기계 울고 있네

전자동 새 기계

들어온다고

모두가 들떠있는

이 공장 작업장

마모된 기어

달랑 달고서

늘어진 체인 줄

달랑 달고서

다시 못 올 작업장

마지막 밤을

새워 가면,

새워 가며 울고 있네

나이 들고 병이 든

노동자인 듯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인 듯

덜커덩, 덜커덩, 울고 있네

 

 


 

 

정세훈 시인 / 밥 먹는 법

 

 

밥 먹는 것에도 법이 있다는 걸

엄동설한 공사판 새참

야간노동 공장 야식

더불어 허겁지겁 먹어 본

없는 반찬 가난한 밥상

함께 옹기종기 먹어 본

우리는 절실하게 안다네

내 밥 수저에 올릴

반찬 한 젓가락 집어

상대방의 부실한 밥 수저에

말없이, 고이 올려주는 법

 


 

 

정세훈 시인 / 4.5톤 트럭의 잠

 

 

몸이 아담한 아내가

매달려 가듯 운전대를 잡은

4.5톤 트럭이 차선을 바꾸자

운전석 뒤편에 매달린

링거 팩이 흔들거린다

밤낮 없는 35년의 세월

트럭을 몰다 덜컥

신장병에 걸린 남편

시속 100킬로미터 트럭 안에서

복막투석을 하고 있듯

가을 찬비 부슬부슬

하염없이 차창을 타고 내리는

심야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생명의 소리가

어둠이 쌓인 세상을 밝힌다

투석을 마치고 이내 잠이 든

남편의 시끄러운 코 고는 소리

살아 있다는 생명의 소리다

간혹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아내는 손을 뒤쪽으로 뻗어

남편의 손을 만져 본다

단순한 도로는 아내가

복잡한 도로는 남편이

번갈아 운전하는 날이

또다시

더 이상 깊어지지 않을 만큼

깊어진 고속도로의 밤

휴게소 주차장 트럭 옆에서

라면을 끓여 때 없는 허기를 달래고

부부는 비로서 새벽 잠자리에 오른다

운전의 뒤편 전기장판이 깔린 공간엔

병든 남편이 눕고

아내는 운전석에 나무합판을 깔고

곤한 잠을 청한다

"꼭 신혼 단칸방 같지 않나요?"

애써 웃는,

4.5톤 트럭의 잠!

 

 


 

 

정세훈 시인 / 나는 더 아파야 한다

 

 

내가 정말 인간이라면

나는 더 아파야 한다

단순히 먹고 짜는

동물이 아니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인간이라면

나는 더 아파야 한다

노동법 조항 하나

제대로 적용받지 못하는

영세 소규모공장 노동자 설움 앞에서

나는 더 아파야 한다

똑같은 노동을 팔지만

정규직 반값 노임을 받는

파견 비정규직 비애 앞에서

나는 더 아파야 한다

언제 복직되어

노동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해고의 절망 앞에서

착취 자본 어용 복수노조

비호 정권 권력

용역 폭력 자본 비호법이

절망의 노동을

고공 크레인

고압 송전 철탑

굴다리난간, 성당 종탑

허공에 매달아 놓은 천막 앞에서

춥고 배고프고 누울 곳 없는

저 아슬아슬한 생 앞에서

투신하고 목을 메는

막막한 주검 앞에서

세상만사 다 그런 거라고

그저 그런 거라고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꼴도 있는 법이라고

그러하니

세상 일 참견하지 말고

아픈 몸 건강이나 잘 챙기라고

던지는 충고 앞에서

나는 더 아파야 한다

그 아픔 속으로

투신하여

내 목을 매어야 한다.

 

-시집 <몸의 중심>에서

 

 


 

정세훈 시인

195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