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순 시인 / 옛집
살던 집에 가봤네. 사랑은 퇴락하여 반쯤 무너지고 댓돌엔 인적 그쳐 이끼 거뭇하네. 마루 밑엔 녹슨 낫과 호미, 흙이 되어가고 밟으면 우렁차게 소리치며 돌던 네 기상은 어디로 갔나? 허물어진 헛간에 탈곡기 무심히 놓여 있네. 부엌에선 어머니와 아주머니들 고소한 냄새 가득한 음식 장만으로 부산하고 바심하는 마당엔 할아버지 숙부님들 듣기 좋은 웃음꽃 피우고 누이들과 나는 장난질하며 볏단 날랐지. 장대비 오는 여름날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꾸리가 신기했지. 개구리들이 둥둥 배를 두드리며 마당을 가로지르고 습기 찬 도랑에선 가끔 두꺼비가 나들이 나왔지. 그리운 것들은 다 가시고 들에 있던 개망초, 옆으로 기어가는 바랭이풀 마당을 덮었구나. 눈시울 뜨거워져 발길을 돌리는데 -아들아, 아들아, 돌아오너라! 누가 있어 나를 부르나, 돌아보니 뒤란의 키 큰 늙은 감나무 변함없이 푸른 잎 무성한 팔 활짝 펴고 있네.
-시집 <왼손을 위하여> 천년의시작
조성순 시인 / 왼손을 위하여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이는 천재라 생각했다. 내게는 멀리 있는 왼손이 그에게는 바른손이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던 누이는 밥상머리에서 자주 쥐어박혔다. 어데서 못된 것 배웠느냐고
나도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싶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멀리 있는 왼손을 알고 싶어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닿지 않아 음식물이 미끄러지고 자꾸 떨어졌다.
하루 또 하루 왼손을 잊지 않았다.
삼 년이 지나자 -왼손잡이시군요? -어른들이 뭐라 안 하셨어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가문이 너그러웠지요.
마침내 왼손이 가까이 왔다.
-시집 <왼손을 위하여>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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