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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연희 시인 / 도무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7.

한연희 시인 / 도무지

 

 

밍로는 어떻게 산을 옮겼을까*

밍로는 어떻게 신을 잃어버렸을까

어째서 구름은 구름으로 있게 되었을까

봄방학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는데

학교 앞에 아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모르겠어

왜 어린 딸은 숨죽여 울려고만 하는지

밍로가 누군지 기억나질 않는데

어떻게 딸은 밍로를 찾아 부르는 것일까

밍로 때문에 구름이 모여드는 것일까

잔뜩 찌푸린 구름 안에 밍로가 들어간 것일까

뒤쪽에 있던 산이 어느새 우리 앞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작고 볼품없는 앞코를 들이밀어

밍로를 만들어냈을 신이

우리를 다시 거둬가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일까

도무지 모르겠어

방학이 오면 우리는 산에 가기로 했었는데

아직 눈이 쌓인 산허리를 오르며 설인을 찾기로 했었는데

키가 너무 커서 곧 쓰러질 것 같았던 설인을

딸은 언젠가 봤었다고 얘기했었지

그 설인이 밍로였을까

그 밍로가 딸의 눈꺼풀을 훔쳤을까

언제 딸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을까

어째서 신에게 나를 줘버렸을까

산은 그렇게 푸르고 거대하면서도

어떻게 순식간에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는 것일까

딸과 나는 거기에 있었는데

우리도 그렇게 사라졌던 것일까

분명 밍로라는 이름을 그림책에서 본 것 같은데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밍로는 재를 뿌리는 구름이거나

밍로는 우리가 밟아버린 개미 떼 혹은 잃어버린 신주머니

어디에서건 밍로를 발견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면

갑자기 완벽하게 침묵해버린 학교

그 앞에 선 우리는

골목을 따라 천천히 오른다

산으로 오르는 또 다른 딸과 엄마를 본다

누구를 죽이고 누군가 죽는 풍경을 본다

생채기가 가득한 손바닥 안에서

웅크린 밍로를 본다

방학이 끝나버렸는지 모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산으로 간다

작은 신들이

오르막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한연희 시인 / 그래서 구구

 

 

 구구와 구팔은 자매인 동시에 그저 남이다 한쪽은 암기 능력이 뛰어나지만 한쪽은 관찰력이 뛰어나다 구구는 왼손잡이지만 구팔은 오른손잡이이다 그래서 구구와 구팔은 서로 닮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닮은 구석을 발견한다 가령 새끼손가락이 유난히 짧거나 귓불이 둥글고 도톰한 것

 

 구구와 구팔이 서로를 깎아내리기 시작하면 둘은 사과 같아진다 사과는 하나다 하지만 곧 쪼개진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껍데기는 종종 알맹이를 잃어버린다 모난 부분을 도려낸다 사과였던 흔적을 본다 어째서 우리는 뼛속까지 다르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라서

 

 구구는 구팔을 껴안는다 실체가 없는 구팔은 차갑다 손 아래로 흘러내린다 너는 구구일까 구팔일까 아니면 구삼 구이 구영…… 흐르는 동시에 멈춘 시간이 물통에 빠진다 물통에서 오늘이 불쑥 솟아난다 줄줄 바깥으로 흘러내린다 바닐라와 초코, 아몬드와 슈퍼에고, 이드와 숟가락,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 한 스푼으로 자신을 깨달을 거야

 

 구구는 크게 떠서 먹는다

 구팔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첨부사항

 

 


 

한연희 시인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2016년《창작과 비평》 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