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시인 / 꽃밭
한 밤중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사라지는 법을 가르쳤지? 꽃밭의 꽃들은 다 어디 갔지?
꽃의 가슴에서 불쑥 튀어나오던 눈물 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생생한 혈관 몇 줄 살아있는가
핏줄도 살점도 파동도 바싹 마른 짐승 한 마리처럼 꽃밭이 없어진 곳 간절함이 없어진 곳 낯선 곳에 오래 서있게 되었네
내가 더 없어진 더 흐려진 무음 같은 곳에
내가 아닌 것들은 꽃이 아닌 것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아픈 곳이 달라서 색깔이 다른 꽃들이 세상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포옹하고 있는 동안
내 꽃 한 송이 들어있는 거기 있던 꽃밭
꽃 없어지고 나 없어지고 그 밭은 어디 가 있는가
계간 『계간문예』 2023년 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산다는 건 격렬한 것 몇 계단 내려와 두리번거렸다
자꾸 내려가면 나의 무엇이 남나? 잘 보이던 나뭇가지 하나 덜 보인다
하나님은 아직 저 아래 있다 마지막 나뭇가지처럼 무너지듯 잠들어 있다
사람들은 무더기무더기 계단을 오르고 나뭇가지 몇 개 더 보고 있다 나는 몇 계단 더 내려간다
계단 위에 발들은 구름처럼 있다가 지워진다
이 계단의 혀는 너무 길어 한 사람이 지워지면 다른 한 사람 너무나 개인적인 나뭇가지들 사정 없이 흔들리고
날 수 없으니까
발을 내려놓고 몇 계단 더 내려간다
묻혀야 한다면 땅에 닿아야 한다 나뭇가지들이 누워있는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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