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섭 시인 / 등대 시인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 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이홍섭 시인 /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이홍섭 시인 / 수박
찌는 여름날 노스님과 유발상좌는 웃통을 벗고 수박을 먹었습니다 넌닝구 사이로 내설악 바람이 숭숭 들어왔습니다
수박씨를 절 마당에 툭툭 뱉으며 유발상좌는 두고 온 한 여인의 까만 눈동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노스님은 자꾸만 흐르는 강물 쪽으로 수박씨를 톡톡 뱉는 것이었습니다
참매미 초록으로 울어쌓고 수박씨 지천으로 널린 여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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