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 시인 / 팬더마임 ㅡ믿음의 형태 서로 잘라내고 싶은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 주세요.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무표정한 눈과 마주친다 쏟아진 주스는 컵에서 멀고 오렌지 밖을 넘지 않는다 자국은 둥글고 바닥은 자국을 힘껏 밀어낸다
컵 하나를 슥슥 지운다 오렌지를 다른 컵에 담으면
컵은 컵의 방식으로 오렌지는 오렌지의 방식으로 쏟아진다 탁자를 뚫고 나온 얼룩처럼 필사적으로
눈을 파내자 검은 얼굴이 환해진다 컵 하나를 다시 세운다 가만히 두면 싹이 나는 감자처럼 잘못은 매일 닦아도 흘러넘쳐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음만 먹으면 믿음은 정말 믿음으로 완성되겠지만 계간 『불교문예』 2023년 봄호 발표
김지율 시인 / 올란도
흰 손수건 안에서
꿈틀거리며 왼쪽 날개가 나왔다
유리를 닦자
오른쪽 날개가 삐죽 나왔다
남은 날개를 밖으로 보내 주세요
바람이 펄럭이자
꿈 밖으로 흰 새가 떨어졌다
다시 유리를 닦자
모서리 아래 발자국 둘이 떨어지고
어둡고 긴 뼈 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월간 『현대시』 2023년 10월호 발표
김지율 시인 / 긍지의 날을 위하여
사라지는 이름처럼 시간은 처음의 모습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실패에 가깝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긍지의 날은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오늘이 아닌데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누워있는 해골처럼 어떤 날은 긍지가 멈추고 어떤 날은 긍지만 자란다
긍지는 왜 두 글자에서 시작해야 했을까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 쓴 글씨처럼 호의도 적의도 없는 마음이 방안에 가득 차 있고
긍지 안에는 왜 긍지가 없나요
남은 얼굴들을 천천히 다시 쳐다보면 눈 코 입이 조용히 녹아내리는
오늘은 새로운 긍지의 날입니다 계간 『불교문예』 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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