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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성 요한 다마스체노 사제 학자

by 파스칼바이런 2010. 4. 29.

성 요한 다마스체노 사제 학자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신앙을 옹호하는 저술과 능변으로 일명 크리솔호아스(Chrysorrhoas) 즉 황금의 강 혹은 황금의 웅변가라고 불리는 동방 수도자요 교부인 요한 다마스체노는 645년경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출생하였다.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가 기적적으로 개종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성 요한의 출생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는 다마스커스의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정부 관리로서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며 말 타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 외에, 사라센인들에게 포로로 잡히어 그 뒤에 석방된 이탈리아인 수사 고스마를 통하여 일반 학문은 물론 철학과 신학까지 배우게 되었다.

그가 후에 학자로서 대성하게 된 것은 이 훌륭한 스승의 덕분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날 즈음의 다마스커스는 회교도들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극히 불평등한 대우를 하고 세금을 과중하게 요구하고 사회적인 신분도 매우 낮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가끔 그리스도인과 유다인들을 요직에 앉히기도 했다.

그는 성장하여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관리가 되었는 바, 그의 우수한 재주와 학식과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곧 회교도인 왕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당시 십자가나 성상, 성화에 대한 존경을 모조리 우상숭배의 미신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며 이의 파괴를 주장하는 이단이 창궐하게 되고 동로마 황제 레오까지 가담하여 신자들을 박해하므로 요한은 분연히 일어나 십자가 및 성상 성화 공경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옹호하며 성상파괴론자들의 그릇됨을 논박하였다.

그러자 동로마 황제 레오가 이에 분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상 공경을 금지한 것은 동방 교회 그리스도인인 레오 황제였지만 요한은 회교 영토에 살고 있었는지라 그를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왕에게 요한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이를 믿은 왕은 몹시 노하여 근위병을 시켜 요한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께 대한 신심이 깊은 그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밤중에 그의 절단된 팔을 깨끗이 붙여주어 그의 무죄를 증거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그의 축일 미사에선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얘기가 나오는 복음(마태 12,10)을 읽는 관습이 있었다.

 

그는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뜻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틀에게 나누어주고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그 후 성지를 순례하고 나서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말 사바의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의 스승 고스마와 더불어 수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마르 4,22)고 했듯이 그들의 명성을 들은 예루살렘 총주교 요한 5세는, 먼저 고스마를 마후바의 주교로 축성하고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고스마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양떼를 잘 보살폈으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에서 가르치며 신앙 문제에 관하여 주교들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다가 결국은 자기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학자요 시인으로 살기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스승 고스마에게 성모님께서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라"고 분부했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많은 글을 썼다.

수집하여 자세히 논평을 가하는가 하면 교황의 수위권, 교회의 무류성 등을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께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성모 공경의 아름다운 신심서도 저작하였다.

 

그는 네 가지 분야에서 유명하다.

첫째 성상 공경을 반대하는 성상파괴주의자들과 당시의 이단자를 반박하고 성 교회의 진리를 옹호한 점으로 유명하고 둘째로 마지막 그리스 교부로서 그리스 교부들의 총서인 그의 저서 "전통신앙론"으로 유명하다.

이는 서방 교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견줄 만한 것으로 동방 교회에서 교육 자료로 사용하였다.

세째로 그는 시인으로서 로마누스 멜로디스토와 함께 동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두 시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축일의 많은 찬미가를 지었다.

네째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섬과 마리아 축일에 관한 설교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망 날짜는 불확실하나 대개 749년경으로 보며 이에 의거한다면 104세까지 장수한 셈이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이 이단임을 선언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787년에 열렸으니 그의 성상파괴론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보기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말 사바 수도원에 묻히고 12세기까지는 그곳에 있었으나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그의 유해는 옮겨져 공경을 받았다.

요한은 "내 입에 당선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불혀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알아듣기 쉬운 말재능을 주시어 당선 현존이 언제나 나를 두루 살피게 해주소서. 주여, 나를 기르시고 나와 더불어 당신 자녀들을 길러 주시며, 내 마음이 우로나 좌로나 이탈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선하신 영께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어 내가 하는 일이 당신의 뜻에 맞게 하시고 또 죽는 날까지 그러하게 하소서"('신앙선언' 중에서)라는 그의 아름다운 기도처럼 일생을 살고 마쳤으며,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1890년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축일은 12월 4일.

 


 

축일 12월 4일 다마스쿠스(Damascus)의 성 요한(J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