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과 요한 복음사가 제단화 한스 멤링 1474-1479년, 다폭제단화, 중앙 패널(174x174cm)과 양쪽 날개(176x79cm), 브뤼헤 성 요한 병원 멤링 미술관, 벨기에. 박혜원
15세기 플랑드르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 1440?-1494년)은 본래 독일 남부 셀리겐슈타트 태생으로, 1465년부터 당시 북유럽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도시, 브뤼헤에 정착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당시 그는 15세기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 ‘양에 대한 경배’(1432년)를 그린 반 에이크 형제{Hubert(?-1426년)와 Jan(1395-1441년)}보다 더 유명하였고, 브뤼헤를 대표하는 화가로 각광받았다. 남유럽인들이 추구하는 과학성과 화려하고 웅장한 표현과 달리 정신성을 중시하고 절제된 표현을 구사하는 북유럽인들의 작품은 ‘원시적 플랑드르 회화’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5세기 당시에 플랑드르 공국에 속했으나 오늘날에는 벨기에의 운하도시인 브뤼헤에서 활동한 멤링의 작품에서는 감정의 절제된 표현과 작품 속을 지배하는 온화하고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멤링 특유의 정밀하고 절제된 표현은 극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 에이크에 뒤지는 화가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그림에 내포된 심오한 정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감정의 절제된 표현은 표출되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희로애락의 감정을 승화시키고 이를 내면화하여 신비로운 베일 속에 감추어두는 것이다. 진리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지개가 걸려있는 어좌에 앉아계신 분, 어린양과 스물네 원로들’
브뤼헤 성 요한 병원의 성당을 위해 제작된 이 제단화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멤링 특유의 균형 잡힌 차분한 구도와 매우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색감이 정밀하고 절제되게 표현되었다. 이 다폭 제단화의 중앙 패널에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북유럽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인,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Sacra Conversazione; 성스러운 대화)’가 다루어졌는데 이는 직접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기보다는 성인들에 둘러싸인 성모자의 고통을 묵상하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관객을 묵상으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제단화의 왼편에는 참수당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이를 쟁반에 받아 든 살로메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파트모스 섬에 있는 요한 복음사가가 요한 묵시록을 써내려 가는 모습과 그가 본 세상의 종말의 장면이 환상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면에서 생략된 제단화의 날개 뒷면에는 이 제단화를 주문한 이의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례자 요한과 요한 복음사가 제단화’의 오른편 날개 상단 부분).
제단화의 가운데 그림 화면 중앙에는 수난의 상징인 붉은 망토를 두른 천상의 여왕 마리아가 화려한 플랑드르 건축물 안의 옥좌에 앉아있다. 왼쪽에는 목자 차림의 세례자 요한과 그를 상징하는 순백의 어린양이, 그 앞에는 작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천사가 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가 연주하는 천상 음악은 이 평화롭고 성스러운 공간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화면 앞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가 그녀를 고문하는 데 쓰인 물레바퀴와 함께 묘사되어 있고, 그 맞은편에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성녀 바르바라와 그녀가 탈출한 석탑이 그녀 뒤에 그려져 있다. 가타리나 성녀는 병원에 있는 수녀들의 관상적인 면을 상징하고 바르바라 성녀는 수녀들의 활동적인 면을 나타낸다.
한스멤링의 성요한 제단화 중앙
오른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요한 복음사가가 황금색 성배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 작은 뱀이 기어 나온다. 외경에 따르면 에페소의 한 사제가 독이 든 컵의 물을 마시라고 하자 요한 복음사가는 그 자리에서 컵에 든 독을 뱀(또는 작은 용)으로 둔갑시켰다고 하는데 그 일화를 그린 것이다. 그 앞에 흰색 옷을 입은 천사는 성모 마리아가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들고 있다.
오른쪽 제단화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요한 복음사가가 온화하고 평화로운 얼굴과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 종말의 장면을 글로 기록하여 옮기고 있다. 그의 황홀경에 빠진 듯 반쯤 벌린 입과 어린아이의 솜털같이 붉은 머리카락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화면 상단부에는 요한 묵시록에 묘사된 장면이 매우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전체 이야기는 전경의 요한 복음사가를 시작으로 말 탄 이들의 모습을 따라 상단의 천상옥좌 모습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S’자 구도를 이루며 차분하면서도 역동적이고 환상적인 드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다. 또한 지상과 천상의 장면이 수면에 비추인 묘사는 화면에 신비로운 투명감을 주면서 매력과 깊이를 더해준다. 요한 묵시록의 기록을 매우 충실하게 시각적으로 묘사한 이 제단화에서는 역시 어느 부분도 대략적으로 처리하지 않는 플랑드르 화가의 섬세함과 진지함이 느껴진다.
좌측 상단을 보면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계셨습니다. 거기에 앉아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묵시 4,2-3). 그 중심에는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있는데, 지상의 끝을 마무리하고자 온 것이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묵시 5,6-7).
한스멤링의 성요한 제단화 오른쪽 날개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멤링은 이들을 천상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어좌에 앉아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묵시 4,4-10).
이와 같이 멤링은 요한 묵시록의 장면을 최대한 충실하게 시각적으로 펼쳐보임으로써 우리에게 깊이 있는 주관적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렇게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그의 표현은 성경의 내용에 최대한 근접하고자 혼신을 다하여 깊은 감동을 준다.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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