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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 엘 그레코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5.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 엘 그레코

1586년, 캔버스에 유화, 480x360cm, 톨레도, 산토 토메(Santo Tome) 성당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본명이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플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인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년)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베네치아를 거쳐 스페인의 수도이자 스페인 가톨릭의 본거지인 톨레도에 정착했던 화가이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 정착한 이유는 가톨릭 대한 격정적이면서 깊은 신앙심 때문인데, 그는 당시 유럽에 만연한 사실적인 화풍을 피해 고대의 비잔틴 양식, 곧 사실성이 배제된 엄숙하고 딱딱한 양식이라는 중세적 이념이 살아 숨쉬던 스페인을 찾았던 것이다. 특히 톨레도는 그에게 엄격한 사실성에서 벗어나 성서의 이야기를 새로운 양식을 통해 더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톨릭의 환상적 분위기에서 엘 그레코는 왜곡 변형의 기법을 통해 극적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형태와 고르지 않은 색채를 근간으로 한 엘 그레코의 화풍은 비평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은 오랫동안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되는데, 그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한 것은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의 전위 예술가들이다.

 

엘 그레코는 수많은 성화를 그렸는데, 우리가 살펴볼 작품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The Burial of Count Orgaz)’이다. 이 작품의 구도는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뉘어있다. 하층부는 장례미사라는 현실세계로 사제복의 두 성인이 한 귀족을 무덤 속에 안장시키는 모습이다. 바로 25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다. 이 그림의 소재는 오르가스 백작을 매장하려 할 때 일어난 기적이다. 곧 그의 시신을 묻으려 할 때 두 사람의 성자가 천국에서 내려와 그의 시신을 받아 무덤에 안치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기적이 일어나자 그의 무덤 위에는 성당이 세워지고 이름을 ‘산토 토메’라 불렀으며, 이 그림은 그 부속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아랫부분과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그림의 상반부는 천상의 모습이다. 그 꼭대기에는 길게 늘어진 팔을 뻗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 그 왼쪽으로는 마리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무엇인가를 탄원하는 성 요한이 있다. 또 마리아 뒤쪽으로는 천국의 열쇠를 쥔 베드로도 보인다. 요한의 뒤 여러 인물 중 검은 머리의 뚜렷한 옆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스페인 왕이었던 펠리페 2세이다. 1584년 영국 신교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켜 패배한 왕이기도 하고 유럽 영토를 가톨릭으로 통일하고자 했던 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리아와 성 요한의 아래쪽으로는 아주 사실적인 형상의 날개를 펄럭이면서 죽은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며 날아가는 천사가 있다. 이 천사가 들고 있는 흐릿한 영혼이 죽은 오르가스의 영혼이다. 바로 이 오르가스의 영혼이 하늘에 당도하자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이 그 영혼을 천국의 세계로 받아줄 것을 예수에게 간청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이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것이다. 백작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축하라도 하려는 듯이 천국의 왼편에는 음악가들이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구름으로 이루어진 형태 속에는 애매하지만 수많은 인간의 영혼이 화염 같은 움직임을 통해 예수를 향하고 있다.

 

이런 모호하고 혼돈된 천국의 형상에 비해 지상의 하단부는 질서정연하고 그 형상들이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일련의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얼굴들의 벽’이라고 부른다. 당시 스페인의 저명한 인물들의 초상화인데, 그 인물들 중에는 화가 자신과 그의 아들 호르헤이도 보인다. 호르헤이의 주머니에 나와있는 손수건에는 자신이 태어난 1578년이라는 글자가 쓰여있기도 하다.

 

그 아래로 죽은 오르가스 백작과 양쪽에서 그를 들고 있는 두 성인이 보인다. 왼편의 부제복을 입은 사람은 성 스테파노로, 서기 35년 부제로서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다. 성 스테파노는 흔히 젊고 점잖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예수의 사도들이 임명한 최초의 부제이므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부제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가 입은 예복에는 성난 군중에게 돌을 맞고 있는 자신의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이다. 그는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종교인이기도 하다. 이런 성 아우구스티노가 성자의 예복을 입고 주교관을 쓰고 있는데, 그 예복에는 순교자들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 두 성인이 지금 백작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 전경 오른쪽을 보면 투명한 중백의(소매가 넓은 흰 성직자복)를 입은 사제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람이 바로 이 성당의 사제인 안드레스 루네스이다. 오르가스가 죽으면서 교회에 많은 액수의 돈을 유증했는데, 그 후세들이 이 사실을 부인하고는 유언을 이해하지 않자 루네스는 법정 투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하여 고인의 유언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기념하고자 이 그림을 주문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엘 그레코는 성서 위주의 인물과 사건, 성자들,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들을 주제로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이지는 못하지만 비사실적인 터치, 비현실적인 색감을 통해 이야기의 구도를 우리에게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샤갈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사 석사, 파리 3대학교(Sorbonne)에서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