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발현과 성인 이야기]
성 도미니코에게 로사리오를 주시는 성모
구이도 레니,
1596, 이태리 볼로냐 성 루카 성당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St. Dominicus, 1170-1221)은 스페인의 칼렐류에가에서 펠릭스 데 구스만과 귀족 폰 아자 가문의 요안나에게서 1170년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두 분 모두 신심이 두터운 분들로서, 어머니 요안나는 1828년 복자위에 올랐다.(Bl. JOAN of Aza 축일 : 8월 8일)
도미니코는 이러한 부모님에게서 철저하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4세에는 일찍이 팔렌시아 대학에 입학해 10년간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고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스페인의 오스마 주교좌성당의 참사 회원이 되었다.
당시 참사 회원들은 장백의(長白衣)에 두건(頭巾)이 달린 망토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훗날 도미니코회의 흰 수도복이 되었다.
젊은 사제 도미니코는 모든 임무를 자기 양심에 후회됨이 없도록 완수했으며, 세상 사람들을 위한 연민과 애정도 커서 죄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철야기도도 자주 바쳤다. 이후 도미니코는 참사회 부원장이 되었고, 1201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묵주기도로 이단자들 물리쳐
1203년 스페인 왕 알폰소가 자신의 왕자를 남 프랑스 한 왕국의 공주와 결혼시키고자 사절을 보낼 때 도미니코도 그 일행에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여정에서 도미니코는 그동안 자신이 연마한 성덕과 지식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큰 감명을 주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절단은 남 프랑스에 도착했으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 목적하던 공주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되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여정에 알비파의 이단으로 인해 소란한 지방을 통과하게 되었다.
알비파 이단은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모든 물질들을 악으로 보고, 출산도 금하고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을 섭취하는 지나친 고행을 강요하며, 주님의 강생과 성사를 부정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에 대항하고자 교황은 시토 수도회 원장인 아놀드와 베드로 카스텔로가 1년 전부터 파견되어 설교와 권유와 기타 모든 힘을 다하여 이단자들의 회개를 위해 일했으나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도미니코는 자원하여 이 이단지역에 뛰어들어 이단사상과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처음에는 설교로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주교님을 모시고 호화로운 숙소에 묵으며 아비파 금욕주의자들의 가난한 생활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자 “당신들이 이단자들의 회심을 바란다면 그들처럼 가난하고 겸손하며 보속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디에고 주교가 권고하였고, 도미니코는 그 의견에 흔쾌히 동의하여 교황 사절을 도와 청빈의 고행을 하며 검소한 생활과 엄격한 고행을 실행하며 순회설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자 이단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여러 번 암살당할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주님의 특별한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단자들은 술책을 바꾸어 이제는 공개 토론을 하자고 하였다. 이에 도미니코는 성모님께 도와주시기를 청하며 기도를 바쳤는데. 성모님이 나타나서 묵주를 주시며 묵주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하셨다. 도미니코는 이를 받아들여 사람들에게 성모송 외우기를 특별히 강조하며, 보기 좋게 이단자들을 논파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미니코는 성모송을 외울 때는 그 수가 일정 수에 달하도록 외우라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묵주 기도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제창은 큰 반향을 일으켜 마침내 많은 신자들이 성모송을 외우기 위해 묵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모님의 사랑하는 두 아들 도미니코와 프란치스코
도미니코는 이단이 발생하는 것은 신자들이 교리지식이 부족함 때문임을 알고 설교와 종교교육을 주요 카리스마로 하는 도미니꼬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도미니코는 여러 차례 툴루스 교구의 주교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의 이상은 하느님과 학문연구, 기도로서 오로지 그는 “하느님에 대해 하느님과 함께 말하기”를 원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니코 성인의 환시에, 하느님의 분노에 의해 위협받는 죄 많은 세상을 보았는데 성모님의 중재로 구원받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성모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두 사람을 지적하였다. 하나는 도미니코, 다른 하나는 낯선 거지 곧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였다. 도미니코는 그를 얼싸안고 환영하였다. “당신은 나의 친구, 나와 동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합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전통을 지키고자 오늘날까지도 1년에 두 번씩 도미니칸 수도자들과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이 함께 만나 미사를 봉헌하며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5월호, 장긍선 예로니모(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