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준 교수의 성화이야기]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The Vocation of Saint Matthew)
1599-1600, 캔버스에 유화, 322x340cm,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콘타렐리 소성당, 로마
서구 바로크 미술의 탄생을 알린 이탈리아의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예술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폭행과 결투, 살인과 도피, 투옥 등 그늘진 삶을 살다간 ‘저주받은 화가’다. 이 불운한 광기의 천재가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그린 그림 중 하나가 <성 마태오의 소명>이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가장 악독하고 잔인한 폭력배인 세금징수원을 직업으로 삼는 마태오를 부르시며 “나를 따라라.” 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을 보면 구레나룻 수염에 날선 콧날과 강인한 턱을 가진 건장한 청년 모습을 보이시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동반하시고 마태오를 지목하고 계신다.
그림 속 인물들 하나하나를 보면, 가장 왼쪽에는 예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두어들인 동전을 세는 데 여념이 없으며 이 소란을 틈타 동전을 뒤로 빼돌리는 녀석이 있다. 그 옆의 안경 쓴 노인은 동전 세는 것을 감시하고 있다. 이들은 돈에만 관심이 있어 예수의 부르심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 등을 보인 녀석은 부르심에 응대하지만, 손은 칼에 가 있다. 그 맞은편 녀석 역시 응대의 제스처를 보이지만, 예수님보다는 그 뒤의 사람에게 몸이 더욱 기울어져 있다. 이들은 세속의 욕망이나 권력을 중시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베레모의 사내가 있다. 마치 “저 말입니까? 저를 부르시나이까?”라고 대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가락 위치로 보아 누가 정확하게 마태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손가락 위치를 세 번 바꾸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카라바조가 이전에 그린 마태오의 모습과 비교하면 맨 왼쪽의 인물과 안경 쓴 사내를 마태오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당에 있던 조각가 코바르트의 ‘성 마태오와 천사’라는 작품의 이미지는 베레모의 사내를 닮았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카라바조의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마태오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니었을까? 매일 간곡하게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보다는 세속의 욕망에 도취되고 권력에 아부하는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눈에 비친 마태오가 아닌가?
물론 다르게는 많은 죄를 짓고 세상을 떠돌며 극심한 피로와 고독,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던 화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흔쾌히 불러주시길 바라는 내면의 나약한 인간적 심리가 드러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한 무리의 사내들 가운데 나는 누구일까를 되돌아보게 한다.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막은 모리배일까? 아니면 세속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내면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틈도 없는 이기적 존재일까? 혹은 세상일에만 치중하여 말씀을 도외시하는 모습일까?
예수님은 매일 매 순간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부르고 계심을 알고, 귀와 마음을 그분께 여는 참된 신앙의 의미를 새기게 하는 그림이다. 그 마음은 닫힌 창문에 새겨진 십자가로 통하며, 십자가를 물들인 빛과 생명의 길이다. 그럼에도 부르시며 지목하시는 예수님의 손가락에 힘이 빠져 축 처져 있음에 마음 한편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가?
[평신도, 제39호(2013년 봄), 권용준 안토니오(고려사이버대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