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준 교수의 성화이야기] 황색예수(The Yellow Christ)
폴 고갱(Paul Gauguin)
1889년, 캔버스에 유화, 92.1x73.3cm,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Albright-Knox Art Gallery), 버팔로(Buffalo)
역대 많은 화가들이 예수님 수난도를 그렸지만, 그 가운데 가장 우울한 이미지의 예수님은 폴 고갱(1848~1903)의 ‘황색예수’일 것이다. 이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형극을 감내하는 중, 왜 멜랑콜리의 표정을 짓고 계실까?
그림에는 노란색과 푸른색의 커다란 십자가상 있고, 그 주위로 잔잔한 묵상과 기도를 하는 아낙들이 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시골 아낙들이다. 하지만 이 여인들의 강한 손에서 진실한 신앙심을, 그 크기에서 노동의 가치를, 검게 그을린 피부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아름다움이며, 여기가 천국이다.
그런데 이 순정한 여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표정이 왜 이런가? 그 답은 아마도 십자가 뒤편에 아주 작게 묘사된 담장을 넘고 있는 녀석 때문일 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자며 복장이 선원 모습이며, 이 사내가 넘은 담장 너머에는 두 명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신앙에 대한 성당 밖의 배교행위, 성(聖)에 비한 속(俗)의 욕망, 선에 대한 악의 세계를 묘사한 것 같다.
그러나 성당 안의 신앙의 세계나 성당 밖 세속의 세계, 담장 안과 담장 밖의 공간이 모두 같은 색이다. 기도하는 여인의 치마에 서린 붉은색, 그 열렬한 신앙의 색이 담장 밖의 나무들에서도 확인된다. 예수의 노란색, 생명의 에너지이자 행복의 근원인 이 색 또한 온통 담장 밖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작은 집들은 이곳이 실제 인간들의 장소임을 암시하며, 길로 연결된 집들에서 만남과 소통, 즉 이웃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상기시킨다. 고갱이 이 그림에서 그린 것이 신앙의 세계나 세속의 세계, 선의 세계나 악의 세계 할 것 없이 온 사방에 존재하는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화가 고갱은 원래 증권거래소의 직원이었다. 35세 때 실직을 하고 가족을 뒤로한 채 외롭고 고독한 무명 화가의 길을 걸은 늦깎이 예술가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자본과 황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하면서, 그는 인간의 탐욕과 얄팍한 이기심을 경험했다.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세운 자본의 괴력을 되돌아보며, 인간들은 왜 본연의 존재가치와 마땅히 가져야 할 원래의 심성을 잃었는가도 생각하였다. 급기야 그는 인간을 타락시킨 주범인 자본과 이성과 문명에 찌든 인간세계를 내동댕이치고 원래의 순수성을 찾기 위해 비문명, 즉 원시의 세계에 발을 디딜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새로운 원시를 찾아 떠난 곳이 프랑스의 시골, 소박한 인간미가 흐르는 퐁타방(Pont-Aven)이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곳이며, 이 그림의 속의 보잘것없는 여인들이 사는 곳이다. 그는 흙과 태양과 더불어 사는 순박하고 투박한 이곳 사람들에게서 사악한 이기심이나 질투보다는 때 묻지 않은 인간 본성을 읽었다. 신학과 교리에 무지한 이들의 신앙에서 따뜻하고 애절한 마음도 확인하였다. 더 깊은 원시성에 대한 지향은 그로 하여금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로 발을 옮기게 함으로써 화가 고갱의 신화가 탄생되며, 그의 인생편력이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로 재구성되었다.
이처럼 이 그림은 자본과 문명에 의해 훼손된 세계, 부질없는 세속의 욕망이 젖은 사악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화가의 강한 몸짓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타락한 추한 세계를 거부하고, 인간 원래의 참모습을 원시의 본성과 신앙의 힘으로 회복해야 할 의무를 그린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담장을 넘는 사내로 표현된 세상의 타락상 앞에서 차라리 눈을 감고 계시며, 자신이 겪으신 고난과 희생의 이유에 깊은 회한의 우울감에 젖으신 것 같다.
그러나 고갱의 바라는 것은 우리가, 그림 속 온 세상을 적신 노란색처럼, 온 누리에 주님이 계시며 세상이 그분의 의지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겸허한 마음이다. 또한, 사람들이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라는 양분된 지배 관념에서 벗어나, 결국 인간의 존재가치가 관계성, 즉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화해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에 있다는 것을 ‘고귀한 야만인’ 폴 고갱이 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며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며, 내 신앙의 칼날을 세워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평신도, 제41호(2013년 가을), 권용준 안토니오(고려사이버대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