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준 교수의 성화이야기]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존 에버렛 밀레이
1848년, 캔버스 위에 유화, 86.7x139.7cm, 테이트 갤러리, 런던.
서양에서 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실제 삶의 모습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고 숭고하게 꾸며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였다. 이런 예술가들은 하느님 말씀과 그 세계를 더욱 지고하게 표현하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이미지를 선택했던 사람들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왕립미술원이 추앙하는 최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인위적으로 이상화된 이미지로 드러난 성서의 세계에 반기를 든다. 성서의 이미지는 아무 꾸밈이 없이 진정 인간의 이미지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인데, 이는 하느님 말씀이 너무 고상해서 우리와 단절되고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신념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 속 이미지는 실제 인간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삶 속에 깃든 하느님의 은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모호하고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화풍을 고집한 예술가들을 ‘라파엘전파’라고 부르며, 그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가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이며, 이런 조형적 신념이 드러난 그림이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밀레이는 성서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라는 대목을 표현함에 있어, 그 성장 과정을 성스러운 이미지보다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을 담고 있다. 바로 목수 아버지가 일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아름답거나 고상하지 않고, 이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도 하루하루가 궁핍한 사람들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실제 삶의 공간과 현실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시간에 하느님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못에 찔려 우는 아이를 엄마가 달래고 있다. 엄마는 아이의 고통이 무척 안쓰러운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아이의 찔린 손에서 피가 흘러 발등에 묻어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가?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요셉은 일을 멈추고 아들의 손을 살피고 있으며, 할머니 안나 역시 손자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오른편에는 한 소년이 다친 손을 닦고 치료할 물을 담아 들고 오는데, 한발 한발 내디디는 모습이 참으로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거친 낙타 가죽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세례자 요한이며, 수반의 물은 세례수가 아닐까? 맞은편 일에 열중한 사내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심이 없는 자로, 지키기 어려운 신앙의 시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벽의 삼각자는 삼위일체를, 사다리는 야곱의 사다리, 그 위에 걸터앉은 비둘기는 성령이다. 나머지 도구들은 양 옆의 나무판자들과 아울러 십자가를 만드는 도구로 보인다.
우리 일상에서 참된 신앙을 뒤로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를 짜는 일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왼쪽의 널빤지 앞의 짜다가 그만둔 바구니의 거친 줄기는 예수에게 태형을 가하는 회초리를 닮았다.
오른편의 창가에 놓인 등잔은 겸허함을 나타내며, 왼쪽 외부 공간의 양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이고, 그 앞에 붉은 꽃은 예수가 이들을 위해 흘릴 피의 상징이다.
이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 돌아보면 궁핍하고 가난하며, 남의 시선도 동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갑고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 속에도 늘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밀레이는 이 작품을 통해 부와 쾌락을 추구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참된 의미와 진실한 가치가 존재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묻고 있다.
[평신도, 제40호(2013년 여름), 권용준 안토니오(고려사이버대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