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성화 이야기 (1) 렘브란트의 자화상 ‘돌아온 탕자’
1668~1669년, 캔버스에 유화,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대전 세계청년대회에서 무대에 선 한국의 젊은이들이 <돌아온 탕자>를 연기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성경 속 <돌아온 탕자>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한 말씀 한 말씀이 가슴에 쏙쏙 와 박혔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아버지는 집 떠난 아들을 보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가장 높은 테라스에서 늘 기다렸다. 그러니까 아들이 멀리서 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냥 먹을 것과 옷을 입혀주고 안아주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몇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것에 절대로 피곤해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교황님의 말씀이 너무나 명료하여 이탈리아어를 기록하지 않고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잘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면서 죄를 짓고 있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 하느님께서는 다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죄에서 벗어나 희망과 기쁨이 솟아남을 느꼈다. 잘못을 뉘우치면 하느님께서는 다 용서해 주신다니 얼마나 고마우신 하느님인가.
교황님이 일깨워주셨다. 용서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교황님께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일깨워주셨다. 알고 있는 것과 느끼고 깨닫는 것이 다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온 탕자>를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림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된 렘브란트의 이 작품이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도 복제품이 있을 정도로 교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이다. 올 여름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드디어 이 그림과 만났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림의 크기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작품의 세로가 2미터 62cm이니 벽에 걸어 놓고 보면 3미터를 훌쩍 넘기게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림을 보는 순간, 이 그림이 작가가 사망하던 해에 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림의 해석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기존의 성서 중심의 해석 외에도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그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누구의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주제였다. 늙고 병든 화가에게 남 이야기를 그린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는 절실한 마음으로 거대한 화폭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한때 귀족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나가던 화가였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렘브란트 미술관이 그의 저택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두 번의 결혼생활과 파산, 가족의 연이은 사망을 거치면서 말년의 그에게는 헌옷 몇 벌과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불후의 명작 <돌아온 탕자>는 인생의 극과 극을 경험하고 종국에 가서는 가난뱅이로 전락한 화가가 죽기 직전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이다. 그러니 그림 속 탕자는 바로 화가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죽기 직전의 화가가 성경 속 <돌아온 탕자>를 빗대어 하느님께 자신의 평생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것은 방탕한 아들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안기는 순간이다. 화면의 거의 절반은 부자지간의 상봉이 차지하고 있다. 아들은 맨살이 드러날 정도로 헤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신발은 굽이 닳아 슬리퍼로 변한 지 오래다. 그나마 한쪽은 겨우 발끝에 걸치고 있으나, 다른 한쪽은 벗어져서 더러운 발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는 죄수를 연상시키며 이건 완전히 거지 중 상거지 꼴이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두 손을 아들의 등에 포근히 대고 안아주고 있다. 그리고는 말하는 듯하다.
“아들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아버지는 너를 늘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버지는 자식이 그 사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 걱정에 눈에 진물이 났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이다. 순전히 나의 해석이지만 이렇게 말고는 나는 이 그림을 달리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미술작품은 현장에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현장에서 보고 내가 얻은 소득은 바로 이것이었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몇가지 스킬이 눈에 띈다.
첫째는 죄 많은 아들의 비참한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뒷모습으로 처리한 점이다.
손자는 말하였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병법이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보여 주지 않고도 실감나게 만드는 것이 최고 경지다. 그래서인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화가들은 뒷모습 그리기에 도전하곤 했다. 렘브란트 역시 이 그림에서 비참한 아들의 뒷모습을 그림으로써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도 관객이 아들의 비참함을 뼛속까지 느끼게 하였다. 아마도 얼굴을 그렸다면 이 그림이 이토록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음은 탕자의 더러운 발바닥이다. 더러운 발바닥은 카라바조가 <순교하는 성 베드로>에서 선보인 이래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내가 카라바조의 발바닥을 발견한 것 역시 그림을 직접 현장에서 보고 나서였다. 카라바조의 그림 이후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너도나도 맨발바닥 그리기에 열을 올렸으며, 물론 렘브란트의 이 작품도 그중 하나다.
렘브란트는 평생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에게 자화상은 자서전이자, 가장 진실하면서도 익숙한 자기고백이었다. 자화상은 당연히 화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지만 렘브란트는 여기서 얼굴 없는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그가 시대를 초월한 대가인 이유다.
[평신도, 제45호(2014년 가을), 조혜정 가타리나(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