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구도 최휘 시인
우리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어 나는 벤치에 앉아 이 생을 생각하고 있었지
우리 집 개 이름은 인생이야 늘 생을 뛰어다니고 냄새를 맡고 말도 잘 안 듣고 꿈속에서까지 짖어대고 꼭 사람처럼 인생을 다 안다는 듯 킁킁대고 지랄이야
그래도 한 식구니까 간식을 내밀었지 가족은 나무 그늘에 서서 자꾸 뭐를 흘리면서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삼각형은 안정된 구도라고 배웠어 그런데 저 인생이 와서 꼬리를 흔들며 받아먹어야 너, 나, 인생이라는 삼각구도가 되는데 개놈이 저만치 서서는 내가 먹이를 내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목을 틀어 더 바깥을 보고 있는 거야
저 엉뚱한 시선이 닿지 않아 삼각구도가 약화되고 있어 인생아! 소리쳐 불러도 인생은 자꾸 저 먼 곳만 바라 봐
가족은 왜 늘 나무 그늘에 기대어 비웃고 있는 걸까 나는 삼각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믿을 건 인생 밖에 없는데 멈추질 않아, 욕이 이 개놈아! 이 인생아!
계간 『모든: 시』 2018년 여름호 발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면 이베리아에서 봄비가 온다 최휘 시인
나는 봄비, 어젯밤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발했다
가랑비가 내려, 아침을 여는 제인의 목소리다 표정을 살피지 않는다 비의 진행에 방해가 되니까
나는 리듬, 나는 가장 가벼운 흐름, 창가에 잠시 머무는 배후, 구체적인 성과 이름을 얻기 직전이다
제인은 이사의 재인(才人), 그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흘렀다 제인은 아주 먼 곳으로 마지막 이사를 하고 싶다 제인은 지난 번 이사 때 이불을 버렸다 제인은 책만 남았다 제인은 밥맛이 사라진다 제인은 언제나 신도림에서 출발해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나는 폭우를 품은 투명한 물빛, 제인을 향해 두 팔이 날개가 되어 전진할 때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기상 캐스터가 오늘도 강추위가 계속 될 거라고 미리 발설하는 실수를 한다.
나는 봄비, 창문 밖으로 내민 제인의 팔뚝에 또렷하게 내려앉는다 안녕 사랑스런 나의 오디오북, 책 한 권을 소리 내어 읽듯 말이 많았던 제인 너의 입술이 폭우에 무너진 둑방처럼 흙빛이구나.
읽고 싶어서 산 책들이 읽지 않는 책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제인은 저 방이 보이는 이 방에 앉아 먼 곳을 생각하는 제인은 갈 수 없다면 머리라도 미리 노랗게 물들여야 할까 생각하는 제인은 오늘의 날씨를 아랑곳 않고 얇게 옷을 입는 제인은 동원서적 문을 밀고 들어간다 머리칼을 생각하거나 이사를 생각하기 위해,
제인은 종일토록 가랑비를 맞은 아이처럼 방 안에 웅크려 잠들 것이다 계단을 오르다 삐끗하고 양버즘나무의 삐져나오려는 연두를 몇 초 간 올려다 본 게 전부였어, 하면서, 밤새 봄비가 강풍으로 강풍이 대설 예비 특보로 지구 반 바퀴를 건너가는 줄도 모르고,
계간 『모든: 시』 2018년 여름호 발표
비치파라솔 하나가 최휘 시인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우산 대신 만취한 비치파라솔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온 몸이 젖어 있었다 파라솔 한 켠에 야자수잎 몇 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발목이 젖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그가 중심을 잃고 잠시 왼쪽으로 쏠렸다 빗방울들이 파솔라파솔라 까만 음표로 쏟아졌다 파라솔은 여전히 활짝 펼쳐져 있었다
저 아래에서 몇 번 즐거웠지 분홍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그 안에서 우리 몇 번 피투성이가 되었던가 시뻘건 바다 너머로 진보라색 어둠이 몰려오고 취한 물들이 한 잔씩 쏟아지면 편파적인 두 입술이 파란 모래 위로 툭 떨어졌지
돌이켜 보면 돈으로 가득 찬 목소리 후드득후드득 쏟아지던 곳
비치파라솔 하나를 펴는 일은 불쑥 어린 햇살 하나를 낳는 일이어서 비를 피해 파라솔 안으로 들여놓아야 할 장화 한 켤레 같은 일이어서 습진 걸린 손가락의 껍질이 마저 벗겨지는 일이어서
이따금 잠에 취해 파라솔 밖으로 밀려 나간 한쪽 발이나 가운뎃손가락을 태양이 우물우물 씹기도 했다 뜨겁지 않았다
꼬인 혀가 자꾸 꼬이자 파라솔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흔들렸다 파라솔 하나를 접는 일에 둘이 매달려 온 힘을 썼다 그리고나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내일은 올해 가장 뜨거운 하루가 될 거라고 일기 예보가 전하고 있다 일몰이 지나고 일출이 지나고 태양이 절룩절룩 지나갈 거라고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왕노 시인 / 사랑학 개론 (0) | 2019.02.21 |
---|---|
서영처 시인 / 털실꾸러미, 고양이, 겨울 해 (0) | 2019.02.21 |
송과니 시인 / 낡은 고막과 기계톱 외 1편 (0) | 2019.02.21 |
성향숙 시인 / 리듬0* (0) | 2019.02.20 |
이령 시인 / 움트다 (0) | 2019.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