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영처 시인 / 털실꾸러미, 고양이, 겨울 해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1.

서영처 시인 / 털실꾸러미, 고양이, 겨울 해

 

 

겨울 해는 보푸라기가 많다

털실꾸러미처럼 천천히 굴러간다

누렇게 바랜 해가 실을 풀어낸다

폴폴 먼지 이는 실로 목도리를 짠다

새끼고양이가 털실꾸러미를 굴리며 장난을 친다. 쥐를 잡았다 놓았다 놀리는 것처럼

털실꾸러미를 쫓아다닌다 얼굴을 부빈다

양지바른 곳에서 부드러운 털을 고른다

고양이가 꾸는 꿈 위로 고양이 수염 같은 햇살이 포근하다

꼬리를 바짝 세운 난간 위의 고양이가

흰 토슈즈를 신고 지붕을 넘나드는 고양이가

순식간 날아올라 빈 하늘을 할퀸다

찢긴 하늘 사이로 별이 보인다

 

털실목도리를 하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학교에 간다

보푸라기 핀 해는 천천히 굴러가고

하늘 언저리 헌옷처럼 코가 풀리는 햇살

풀린 곳마다 매듭을 묶으며

한 코 두 코 문양을 새기며 나를 뜨는 햇살

증조할머니의 어머니를 풀어 증조할머니를 짜고 증조할머니를 풀어 할머니를 짜고 할머니를 풀어 아버지를 짜고 아버지를 풀어 나를 짜고 나를 풀어 아이를 짜고, 닳고 닳도록 코를 걸어 뜨내려간 내력

 

아이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옛이야기를 듣는다

덜컹거리는 창으로 바람 파고드는 이야기, 재채기 일으키는 이야기

보푸라기 핀 고양이가 공기보다 가볍게 방을 빠져 나간다

 

고양이마냥 잠이 많은 겨울 해가 무덤처럼 무덤덤한 산을 넘어 간다.

 

계간 『시와 경계』 2018년 가을호 발표

 


 

서영처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학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피아노 악어』(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사, 2015)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계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