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의 기둥 김경숙 시인
치욕을 앙다물 때 이빨들은 각오를 다져 기둥이 된다
견칫돌 하나를 쌓으면 탑이 되고 대웅전 앞에 앉히면 부처가 되고 무덤가에 세우면 묘비가 되고 모아놓으면 돌담이 되어
돌 하나가 무력의 방향을 돌려세우기도 하고 오해로 막혀버린 벽을 허물기도 하며 때론 온화한 염화미소를 몇 백 년 동안 켜 놓고 긍휼을 밝힌다
뾰족한 이빨로 따가운 맛을 무수히 보았다
말을 똑 끊거나 허공에 주먹을 갈기거나 목울대를 역류하는 말들을 입속 깊이 가두어두곤 했지만 앙다문 치욕이 뜨거울수록 각오를 세우는 이빨들은 바벨의 도서관처럼 무료한 하품을 맛보곤 한다
수백 성인의 서재를 털어 웅얼거리며 읽은 공덕으로 치면 입 속은 신전이자 내왕의 통로인 것이며 이빨들이란 신전의 기둥이다
계간 『모든: 시』 2018년 가을호 발표
그대, 혹은 그때 김경숙 시인
그때라는 말(言)에 시차를 두고 그대라고 읽으면 자운영꽃 우거지던 계절이 다가와 뜨거운 맛이라고 씁쓸하게 입을 다신다
뒹굴던 꽃술에서 깨어나듯 식은 입술을 닦고 꽃잎 지는 저녁을 서성이는 봄에는 어둑한 시간들이 살갑기만 해서 그때로 가면 그대, 라는 꽃피는 시절이 있어 우리라는 말의 따뜻한 미래를 만날 수 있을까
왜 세상에 그대들은 다 그때에 있고 그때는 왜 이렇게 아득히 먼 곳일까
그때라는 말 두근거리는 봄이 몰려있고 활짝 핀 분홍 심장들이 나뭇가지마다 끓고 있어 귓속말은 부풀어 끝없이 흩날리겠지 너무 눈부셔 꽃잎이 허물어지는 그때와 그대들
아, 무덤 같은 그대, 혹은 그때라는 말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3월호 발표
돌에게서 사람에게로 김경숙 시인
언젠가 어느 산문에서 본 석불은 파릇한 옷 한 벌 입고 앉아 있었다 어쩌다 나도 명상에 들어 몸을 흔들다 보면 그 석불의 시간을 따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도 처음에는 풋내기처럼 징자국 가득한 민둥머리 승려였을 것이다 법회가 없는 지루한 오후가 되면 나른함을 견디려 흔들흔들 침묵하며 몇 백 년을 다 써먹었을 것이다 대신 근처에 있는 가시나무 잎에게 흔들리는 것을 부탁하고 조금씩 굳어갔을 것이다
본분을 찾는다는 것은 흔들리는 몸을 조금씩 굳혀가는 일이다
돌이 늙으면 사람대접을 받듯
본분을 찾기 위해 나는 입술부터 굳어갈 용의가 있다 눈 귀 심장이 차례차례 굳어가다 보면 언젠가 나도 돌 취급 받을 날이 올것이다
월간 『문학도시』 2017년 8월호 발표
구석을 키우다 김경숙 시인
구석을 키우다 보면 점점 앞쪽과는 멀어진다 구석에 구석을 몰아넣고 키우는 불안한 구석들
돌 틈이 민물 지느러미를 물살로 숨겨놓고 있듯, 환한 꽃들이 주춤주춤 낙화를 숨겨놓고 있듯, 펄럭이는 게양들이 바람의 날개를 숨겨놓고 있듯, 멀어지는 앞쪽이 아득할 수 록 내가 돌보는 구석은 점점 뒷걸음질 치는데 내가 키워온 구석마다 두근두근 비밀스런 체온들로 들어차 있다
더는 밀려날 수 없는 막다른 것들이 가득 숨어 자라고 있는 마음 구석이라는 곳
오래 숨겨놓았던 구석들 중 어떤 구석은 이미 백주대낮이 된지 오래고 농염을 핑계로 주책을 돌보고 있는 구석도 있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뻐근해질 때면 구석으로부터의 협박이라 짐작해보는 것이다
구석이 많으면 곰곰 숨어있는 궁리도 많겠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3월호 발표
게양 김경숙 시인
새들은 어느 대륙쯤에 있는 작은 나라의 국기일까요
나뭇가지들 마다 새들이 계양되어 있어요 반짝이는 오색 만국기 같아요 날마다 음역을 놓고 분쟁하는 국기들. 새들이 다투어 목청을 높이는 건 바람 때문이 아니에요 보드라운 날개 밑, 바람은 모두 국경이에요 시끄러울 정도로 넘쳐나게 제각기 국가를 부르는 중일 거예요 그러니 날마다 넓은 공중은 대항전이 열리는 중립지대일 거예요
나무들은 아주 작은 독립국 정치색이 없는 중립국, 공중의 영토일 거예요
오늘도 나무마다 게양된 새들이 저마다 목청 높여 시끄럽지만 헌법과 관습법은 여전히 땅 위의 분쟁이고 보니 가끔씩 불안을 선회하며 펄럭거려요
계간 『시와 소금』 2017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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