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기석 시인 / 평행선 연인
어떤 문장은 가스덩어리다.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이 없다. 내가 라이터 불을 대면 그 즉시 폭발하여 내 얼굴을 태워버린다. 눈을 태우고 귀를 태워버린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촛불이다. 타오르는 파도고 노래하는 풍랑이다. 어떤 문장은 청색 멀미를 일으키고 어떤 문장은 스스로를 문장 밖으로 내쫓아 아름다운 숲이 된다. 그런 밤.
유성우는 쏟아지고 어떤 문장은 제 몸을 길게 늘여 검은 라인이 된다. 라임이 된다. x축이 되고 y축이 된다. 1차원 곡선이 되고 2차방정식이 된다. 그런 밤.
나는 나라는 3차방정식의 세 허근이다. 시간은 계속 자신의 몸을 사방으로 끝없이 늘여 좌표평면이 되고 있다. 무한의 우주가 되고 있다. 그런 밤.
지구는 하나의 점, 화성도 목성도 토성도 우주를 뛰노는 모래알 삐삐들, 밤하늘엔 흰 고래들만 헤엄쳐 다니고 어떤 문장은 문장이 없다. 그런 밤.
돌이켜보면 나의 삶 또한 한 장의 창백한 백지였다. 발을 찾아 떠돌던 외발의 펜이었다. 그런 밤. 나는 해저에서 어떤 문장을 가져온다. 그곳은 너의 눈동자 물의 침실 아픈 새들의 둥지.
돌이켜보면 너의 삶 또한 불 꺼진 찬 방이었다. 세계는 수족관이고 넌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리다 한쪽으로 눈이 돌아간 넙치였다. 그런 밤.
우린 평행선 연인, 안을 수도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난경의 문장들, 건드리면 그 즉시 울음이 터져버릴 작은 물풍선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약에 취해 있고, 어떤 문장은 칼에 찔려 쓰러져 있고, 어떤 문장은 모든 기억을 잃어 표정조차 없다. 그런 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밤.
월간 『시와 표현』 2017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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