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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원 시인 / 시 빵을 굽다 외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3.

시 빵을 굽다

김명원 시인

 

 

        2급 시조리사 자격증을 수여받은 날,

        시 빵을 구워냈다

         

        삼년이라는 맵고 시큼한 시간들이 소요되었고

        간질처럼 열병을 앓게 했던 도깨비불이 불쏘시개였으며

        간헐적인 말더듬, 흐릿한 시력, 하얀 불면, 죽을 듯

        호흡곤란, 그런 것들이 시 빵 재료로 쓰였다

        상한 언어들을 가는 체로 걸러낼 때 힘겨웠고

        무성한 이미지의 오븐을 예열할 때 불안했고

        덜 익은 상징이 될까봐, 바싹 탄 알레고리로

        불량식품이 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기다리는 내내 꾹 참지 못하고

        열두 번도 더 오븐을 열었다 닫았다

        둥근 모양을 네모로 고치고

        식상하지 않은 향료를 첨가하고

        군더더기 메시지를 잘라내고

        조바심치는 비유의 즙을 발라대었다

        당도 높은 랑그(Langue)도 소스로 솔솔 뿌렸다

         

        겨우 빵이 만들어졌다

        맛깔스런 시대의 문학을 공급하겠다고

        예술철학적 노동자로 무급 봉직 해온 세월의 식탁 앞에

        우두커니 앉는다

         

        누구도 함부로 사지 않을 빵빵하지 못한 시 빵!

        나 혼자 눈물에 찍어 시식할

        두려운 새벽이 밝아온다  

 

시집 『오르골 정원』 (천년의시작, 2019) 중에서

 


 

엄마라는 호명의 바깥

김명원 시인

 

 

얇고 낡은 햇살이 그나마 눈머는 정오

 

열두 살, 밥은 아랫목에 묻어두었고 찌개는 곤로 위에 있다, 엄마는 사소한 문장을 남기고, 된장찌개가 고이 숨긴 적적한 온기마저 지우는 눈발 속으로 혼잣말하는 활엽수처럼 사라져갔다. 발자국도 없이 한 줌 흰 새로 날아갔다.

 

함께 심었던 대추나무 위로 수십 번의 분노가 봄마다 붉은 비를 뿌렸고, 수백 번 달들이 복면을 한 채 후회하고 체념하는 사이, 수천 번 목 쉰 바람 가루들이 고였다가 흩어져 내렸다. 수만 번 딸꾹질하는 먹구름이 한숨을 몰아갔다.

 

엄마, 손을 두고 가시지요. 가끔은 자욱한 심해에서 죽지 않을 만큼만 아프게요. 허공은 가르지 못할 만큼 무겁고 단단해서 오늘이 무섭습니다. 버려진 내 두 발로는 저을 수 없는 저 돌의 축사들, 음메 음메 울부짖는 볕뉘에서, 나는 누구인가요, 당신의? 혹은 당신과?

 

느릿느릿 당신을 탐구합니다. 당신에게서 게워져 나오는 미역과 거북알과 태초의 신음 따위를, 결코 썩지 않을 묘지 밖으로 하늘은 늘 비겁하고 남루해질 뿐인데, 누가 사랑을 만들었을까요. 이제는 그 페이지를 뜯어 신발 모퉁이에 적실까요. 사춘기를 건너 온, 격정기를 돌아 온

 

쉰 두 살, 내 눈물에 가둔 겨울들이 막 새기 시작합니다

 

시집 『오르골 정원』 (천년의시작, 2019) 중에서

 


 

첫사랑

김명원 시인

 

 

        그가 평생 가꾼 황무지를 알고 있다

        자신이 살아 온 세월보다 황량하고

        자신이 죽을 세상보다 몇 배나 황막한

        넓디넓은 정적으로 견뎌 온 땅

         

        가끔은 그가 벼랑 톱 바위에서 초승달이 뜨길 기다려

        무른 정신을 달빛에다 예리한 뿔로 갈았다거나

        독한 냉기가 광기로 변하는 겨울바람 속에서

        제 목을 치는 노래로 밤의 끝까지 가 닿아 슬펐다거나

        그리움의 바깥쪽을 닳도록 매만지다 병이 깊었다는

        소문들만 붉은 모래 갈기에 점점이 묻혔을 뿐

         

        버려진 허공들을 주워 모아 사람들은 수거를 하고

        끝내 잊히지 않을 몇 개 추억들이 삽화로 그려 진

        밀서의 파본을 폐기하다가 그의 행방을 두려워하며

        철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목도할 때

         

        오래 어두워 세운 그 황무지를 찾고 찾았던 나는

        고독이 삼켜버린 그의 몸에 다녀 온 꿈을 꾸었다

         

        폭설이 퍼부었다

 

시집 『오르골 정원』 (천년의시작, 2019) 중에서

 


 

오르골

김명원 시인

 

 

그림자는 늘 누워있죠, 일으켜 세우려 할 때마다 바람은 무겁죠, 겹겹이 어둠은 흘러 쌓이는데, 쌓여서 고요히 소리 무덤을 붕긋 세우는데, 최면술을 달여 마신 보름달은 붉죠, 추위에 딱딱해진 달빛이 조금씩 풀어지면 가 닿는 곳은 추억의 산간 마을, 가파른 유년, 입구에는 눈동자 커다란 정자가 서 있고, 상처를 티내는 느티나무 가지 끝에선 잠자던 먹구름이 뭉텅 딸려오죠​

 

어쭙잖은 현기증도 함께 오죠, 불안, 한, 가, 요, 과거가 생생하게 몸부림치듯 일어서려 할 때마다, 근육질의 파도 물결로 불끈 일어서 한 다리로 온 생을 버티고 있을 때마다, 가벼워지는 것이 힘들기도 하겠죠, 혼곤한 무게로 지탱해 온 시간의 후면에는, 내가 내가 아닌 듯, 그래요, 꽃을 든 환영의 사람이 살아나죠, 밤새 쓴 목격담의 시 속에, 시어詩語들이 수백 수천 치어가 되어 날아가는 동안, 나는 사라지죠, 없는 내가 떠난 후, 길쭉이 남은 야윈 그림자가 비로소 서서 노래가 되죠

 

어쩜 내일 또 이렇게 숨바꼭질, 숨바, 꼭, 질, 되감기 될까요, 되겠지요, 감아 놓은 슬픔은 음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며 그림자 근처를 헤맬 테죠, 나는 어디 있나요, 꽃을 딴 환영의 사람이 살찌는 동안 나는 다시 사라지고, 내 그림자는 태엽에 감긴 채 쪼그라들겠죠. 주름 흔적만 지평선으로 우두커니, 홀로 남겠죠

 

시집 『오르골 정원』 (천년의시작, 2019) 중에서

 


 

김명원 시인

충남 천안에서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 『오르골 정원』,과 시인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 등 출간.  『애지』 , 『시선』 , 『시와 인식』 ,  『시와 상상』 , 웹진 『시인광장』  등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한국시인정신작가상, 대전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대전대학교 H-LAC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