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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영희 시인 / 수를 놓는 처녀들이 있었네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3.

수를 놓는 처녀들이 있었네

안영희 시인

 

 

      앞가슴에 장미 줄기 벋어 오른 검은 색 스웨터 한 장 샀네

       

      대륙의 민족 대모임엔 모자며 옷 자수로 장식한

      소수민족 여인들이 그중 여왕처럼 돋보였네

       

      나락 논 깊숙한 만灣처럼 앞마당까지 파고든

      마을에 밤이 오면

      어느 집 등잔불 아랜 모여앉아 수繡를 놓는 처녀들이 있었네

      목단 매화 물가의 사슴들을 수놓는 동안

      처녀들의 무르팍에 풀어놓은 오색색실들에 홀려서

      밤 마실 길 따라 나서곤 하던 아이가 있었네

      농경사회의 하루살이 누구라 할 것 없이 고단함 아니었으랴만

      수틀을 안고 한 땀 한 땀 혼수용 베갯모를 수놓는 일은

      무중력으로 꽃향기 따라가는 몽유경이였으리 시골처녀들에게도

       

      발달한 문명이란 드라이한 세상의 다른 말인가

      대성당, 성당 성당의 천정까지를 꽉꽉 쟁여 멕인

      수탈한 식민지의 보석과 금은보화

      세기의 다음세상에서도 몰려오는 구경꾼들로 앉아서 돈을 버는

      유로며 달러의 나라에서는

      막상 사고 싶은, 아기자기 꿈을 주는 선물거리가 내겐 없었네

      수면제 과다 복용한 내 여권 서랍 속에서 고독사 한 후로도

      여직 내게 간직된 것들은

      히말라야 아랫마을에서 산 수 놓인 가죽지갑, 올드 델리에서 만난

      환상적 색 배합의 구슬목걸이, 마사이의 팔찌 같은

      하나같이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들의 수공예품들이네

       

      자고 깨면 휘번득번득… 어제를 칼날 쳐 날리며 질주하는 신들린 속도에

      철철 피 흘리며 죽어간 내 그리움의 정처들

      그 한 장이 뭉클 내게로 왔네, 남대문시장에서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안영희 시인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  『내 마음의 습지』, 『가끔은 문 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등의 5권의 시집과 『흙과 불로 빚은 詩』- 도예개인전(경인미술관)이 있음. 현재 《문예바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