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밤의 솜털에 성냥불을 붙인 사람들의 아침. 조용히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은 날개를 접고 주위를 주시한다.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새들도 습관적으로 줄을 지어 날아간다. 높이가 다른 냉담한 건물들과 함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의 한 구석에서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거리는 일, 어디인가 무엇인가 아파도 많이 아파도 죽지 않는 영혼의 일, 지루한 꿈의 일. 그러니까 결국 새의 입장도 밤의 통증처럼 멀리 사라져가는 행인의 뒷모습과 같다. 사랑을 취소하고 사랑을 꿈꾸는 새의 소리에는 인과가 없다. 나를 생각하면 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낡은 체제에 매달리는 동안 불쑥불쑥 밀고 들어오는 꿈도 폭력이라는 것을 새는 알지 못한다. 종일 숲에 매달리다 겨울이 간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간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쉽게 네가 지나갈 줄 알았기 때문에 내일도 끝까지 허공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저녁, 새에 편입되어 읽던 책을 덮는다.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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