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시인 / 길을 채우다
한밤, 셀프주유소에서 길을 채우다보면 휘발하는 길의 캄캄한 갈기 들이 보인다. 어둠을 포효하는 엔진소리에 필시 몇 만 년 전의 질주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맑게 정제된 동물의 질주들이 연료계이지 바늘 끝으로 집중하고 있다. 몇 만 년 전의 쫒고 쫒기는 함성을 가득채운 어두운 시간, 저 부릉거리는 짐승은 위험하다. 자칫, 밤의 끝까지 달아나려 하거나 역풍을 뜯어먹으며 시속 끝을 체득하려 할 것이다.
그곳이 어디쯤이든 시속을 뚫고 검은 밤이 한없이 맑은 새벽으로 정제되는 곳이라면 그건 아득한 욕망이 환산되는 거리 끝에 있을 것이지만 질주란 앞의 일이 아니라 뒤를 버리는 일이다.
불 맛을 아는 저 짐승 너무 많은 거리와 계절을 이동하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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