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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서영 시인 / 입김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3.

박서영 시인 / 입김

 

 

하얗게 귀가 얼어서

기다림은 늘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나는 기다림 곁에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봄이어서

목련은 하얀 총구를 겨누지만

내게는 그것도 따스한 화구(火口)여서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살고 싶었다.

문득

아, 귀는 먼 곳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녹아내린 귀는 녹아버려서 울음이 되었다.

꽃 피는 소리로 위로를 받았다가

꽃숭어리 떨어지는 고통이 귓가에 맺힌다.

불타는 귀를 잘라

죄책감을 넣어둔 상자의 손잡이로 만들어야지

열기에 휩싸인 마음은 귀로 열고 귀로 닫아야 해

소리를 내면 안 되지

울음은 사랑을 분해해 버리니까

자꾸 울어서 모두 떠나는 거니까

여자야, 홀수와 짝수처럼

눈물을 셀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하렴,

목련나무 곁 돌멩이 밑에

달팽이와 지렁이와 뱀이 살고 있다.

그들은 소리죽여 우는 걸 알아

돌 위에 떨어져 있는 목련꽃숭어리 셋

핏줄이 다 튀어나온 돌멩이의 붉은 귀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나비 한 마리

입김이 만든 무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잘게 조각난 선물들이 쏟아지지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산산조각이

기억이라는 걸 알아.

 

월간 『현대시』 2017년 4월호 발표

 

 


 

박서영[1968 ~ 2018. 2. 3] 시인

196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과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이 있음. 제3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