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시인 / 입김
하얗게 귀가 얼어서 기다림은 늘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나는 기다림 곁에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봄이어서 목련은 하얀 총구를 겨누지만 내게는 그것도 따스한 화구(火口)여서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살고 싶었다. 문득 아, 귀는 먼 곳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녹아내린 귀는 녹아버려서 울음이 되었다. 꽃 피는 소리로 위로를 받았다가 꽃숭어리 떨어지는 고통이 귓가에 맺힌다. 불타는 귀를 잘라 죄책감을 넣어둔 상자의 손잡이로 만들어야지 열기에 휩싸인 마음은 귀로 열고 귀로 닫아야 해 소리를 내면 안 되지 울음은 사랑을 분해해 버리니까 자꾸 울어서 모두 떠나는 거니까 여자야, 홀수와 짝수처럼 눈물을 셀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하렴, 목련나무 곁 돌멩이 밑에 달팽이와 지렁이와 뱀이 살고 있다. 그들은 소리죽여 우는 걸 알아 돌 위에 떨어져 있는 목련꽃숭어리 셋 핏줄이 다 튀어나온 돌멩이의 붉은 귀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나비 한 마리 입김이 만든 무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잘게 조각난 선물들이 쏟아지지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산산조각이 기억이라는 걸 알아.
월간 『현대시』 2017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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