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해 시인 / 황사
장미간판 안에서는 돼지고기 굽는 일이 다반사 벌어지고 음복하는 입들은 즐겁다.
지척을 논하는 일에서 일동으로 분노하다 취하는 더러는 아무도 내일을 꺼내지 않는 협동이다.
사막에 장미 심으러 가겠다고 싸우는 객기가 오늘 주제라며 탁탁 침을 뱉어가며 꼬나 잡는 목소리 여기서는 협동이어야 한다.
내일을 달싹이는 사내의 입술은 그때뿐이고 오줌발 지린 장미간판을 실로 나설 때 무엇을 논했든 그 모든 아픔은 두고 가야 하리
동네 공원으로 가는 길은 장미들로 꾸며졌다. 화려한 면면이 새 얼굴처럼 매달려 그 또한 협동이다.
시집 『바닷가 오월』(서정시학, 2018) 중에서
정하해 시인 / 꽃의 최전선
여러 해 땅을 놓쳤던 것들 안으로 걸어 잠근 얼굴이 바짝 말랐다.
죽은 행운목 뽑아내고 다른 화분도 몇 개 준비해 여물대로 여문 꽃씨 심었다. 살아나오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러니까 꼬불꼬불 기어 나오는 불행으로부터의 기척 저 서러운 새끼들
봉숭아는 해가 오는 쪽으로 당장 달려 나가고 나팔 줄기는 아무데나 붙을 작정으로 점점 험악하다.
저들의 분주한 삶이 한바탕 휘몰아치겠다는 생각보다 슬금슬금 내 안에서 놀겠다는 살림살이가 어쩌면 족쇄.
목숨을 저리 저장해 놓고 쓸 수 있다면 목숨의 부레를 채우기 위한 뜨거운 식사자리 잠깐이면 되는 거다. 멀리 떠나 있는 얼굴이 온다. 꽃이 온다.
잡히는 대로 선반이다 일요목연하게 살 한 점씩 걸어놓고 단시간 폭발시키는 그의 밖은 성한 데가 없다.
월간 『시인동네』 2017년 7월호 발표
정하해 시인 / 캐리커쳐
입술과 얼굴을 고치려고 펜을 들었다 거짓말이 쳐놓은 한 판의 덫 많이 만져본 독이다 화판을 걸어 구겨진 이마를 그린다 누군가 쥐었다 놓아버린 좀체 펴지질 않는다 얼굴의 난독을 생각하다 목덜미 끝의 파노라마를 건드렸다 말이 빠져나오는 벽 앞에서 삐뚤거리는 선을 어쩌지 못하고 얼굴만 탓 한다 성깔을 뽑지 않고는 다음 면으로 갈 수가 없어 선마다 자질구레하다 질 나쁜 순서대로 긋다 말고 문득, 훌쭉하게 마른 데서 걸려 나가질 않는 부분에 시나브로 지치고 말았다 천만번 들여다봐도 틀리는 너라는 애물
시집 『바닷가 오월』(서정시학, 2018) 중에서
정하해 시인 / 동태
그 집에서는 동태로 끓인 탕만 판다. 누런 창문 두어 개사이로 좁은 내실이 그런대로 갖추어진 한옥을 개조해 칠순의 그녀가 밥벌이 삼아 끓여내는 탕이 있는, 늘 한산해 보이는 마당을 채우는 건 목련 그 늙은 나무뿐이다.
가지만큼 사람이 든 적도 없고 잎만큼 산뜻하지도 않은 거기, 목련 폈다. 지붕을 가리고도 남아 길 쪽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작금이 일 년에 한번은 오지게 잔치를 벌인다.
동태가 말라 명태가 되는 건 일도 아니지만 동태가 탕으로 푹 끓여지는 일은 더 쉬운 일이지만 어느 쪽으로든 억울해서 목련은 대신 슬퍼서 오는 것이다.
그녀가 처음부터 동태를 죽이지는 않았으리라. 슬그머니 명태가 되어가는 그녀도 얼었다 풀렸다 하던 목 좋은 때가 있었을 것이다.
목련꽃이 동태를 위해 노제를 지내는 동안 세상은 법석 동태 원혼이 목련꽃 이파리마다 좌정할 때면 지상의 사이사이 아무 일 아닌 듯 저 슬픔 나누어 가질 천만가지 봄이 이리로 오고 있다.
격월간 『대구문학』 2018년 5~6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지우 시인 / 9와 4분의 3 승강장 (0) | 2019.04.04 |
---|---|
위선환 시인 / 창 (0) | 2019.04.04 |
박서영 시인 / 입김 (0) | 2019.04.03 |
정선 시인 / 도도 죽이기 (0) | 2019.04.03 |
김영산 시인 / 그녀의 몸은 폭격을 맞은 듯 당당했다 (0) | 2019.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