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시인 / 안개에 관한 짧은 습작
지방 소도시 안개 낀 새벽 아침은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냄새가 나고
낮은 간판의 거리,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읍’이나 ‘리’가 어울리는 짧은 골목에서 우리가 절뚝이는 더러운 개 한 마리를 만났을 때
이제 막 짧아진 연필 하나, 를 그 사람은 주웠다
닮았군요, 물방울 자욱한 정거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멀리 버스의 불빛을 기다리며 그 사람은 작은 칼을 꺼내 연필을 깎는 풍경을 펼치고
단지 안개 낀 길 위에 버려진 젖은 나무토막으로써 무언가를 비유한 것이겠지만
오지 않는 지방 소도시의 버스는 오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그 사람과 나는 서로의 주머니 속 젖은 손을 감춘 채 아주 느린 연필처럼 안개의 백지 속을 더듬어 새벽을 나아가기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대답을 듣길 원하지 않으면서 묻는 이야기가 우리에게선 태어나고
나는 그 사람 손가락에서 상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한 허기를 달랬을까
내 상처가 미안해요
그날, 연필로 쓴 안개의 습작을 썼다가 구겨버리지만 그 사람은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안개는 곧 어느 날 걷히고 말아, 우리는 시간이 알려주는 서로의 민낯을 바라보며 상대가 아닌 스스로를 아쉬워하겠지만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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