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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안개에 관한 짧은 습작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7.

허민 시인 / 안개에 관한 짧은 습작

 

 

지방 소도시 안개 낀 새벽 아침은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냄새가 나고

 

낮은 간판의 거리,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읍’이나 ‘리’가 어울리는 짧은 골목에서 우리가 절뚝이는 더러운 개 한 마리를 만났을 때

 

이제 막 짧아진 연필 하나, 를 그 사람은 주웠다

 

닮았군요, 물방울 자욱한 정거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멀리 버스의 불빛을 기다리며 그 사람은 작은 칼을 꺼내 연필을 깎는 풍경을 펼치고

 

단지 안개 낀 길 위에 버려진 젖은 나무토막으로써 무언가를 비유한 것이겠지만

 

오지 않는 지방 소도시의 버스는 오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그 사람과 나는 서로의 주머니 속 젖은 손을 감춘 채 아주 느린 연필처럼 안개의 백지 속을 더듬어 새벽을 나아가기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대답을 듣길 원하지 않으면서 묻는

이야기가 우리에게선 태어나고

 

나는 그 사람 손가락에서 상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한 허기를 달랬을까

 

내 상처가 미안해요

 

그날, 연필로 쓴 안개의 습작을 썼다가 구겨버리지만

그 사람은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안개는 곧 어느 날 걷히고 말아,

우리는 시간이 알려주는 서로의 민낯을 바라보며

상대가 아닌 스스로를 아쉬워하겠지만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 E-mail: solitude199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