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원 시인 / 구름 경전
구름에도 격이 있다.
하늘을 통째로 전세 살지 않는 겸양과 노을에게 기꺼이 아름다운 마지막 어깨를 양보하는 미덕이 있다.
겨울 산을 넘나든 새떼들의 능선을 방해하지 않으며 맨살로도 추위에 떠는 바람을 품어 안는 관대함도 있다.
한 때는 사춘기 소녀의 현몽이 되기도 이별의 낭송가들에게 글썽이는 그늘 난간이 되어 주기도 면적이 없는 노숙자의 마음을 덮어준 이불이 되기도 하였으며 뭇 화가들의 시심을 밤새 매만져준 젖꼭지였으리라.
한 해가 지며 구름도 진다.
계절 내내 앓아오고 함구하고 비켜 온 낡아진 구름의 날개 뼈들을 거둘 시간.
그을음 구름, 부스럼 구름, 얼룩 구름, 벙어리 구름 들 오늘은 함박눈으로 퍼붓는다.
세상이 온통 하얀 구름의 화술이다.
헐벗은 나무들, 그 문법을 들으며 한 겹씩 굽어진 경전을 피워내고 있다.
계간 『한국시학』 2018년 겨울호 발표
김명원 시인 / 오자(誤字)에게 감사함
스물한 살 대학생일 때 가슴에 정의라는 꽃들이 개화 만발할 때 아현동 달동네 야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나이가 들쭉날쭉한 아이들 중 중국집 배달 일을 하느라 지각대장이던 막내 문수가 졸업을 하며 내게 준 카드엔 “I live you!”
“I love you” 보다 지독한 당신을 산다는 당신을 살고야 말겠다는 비장의 연서는 빨강글씨로 내내 내 가슴에 새겨져 불타올랐다. 그 이후 받은 모든 프러포즈는 무효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시를 검색하다가 십년 전에 쓴 내 시를 읽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문득이라는 단어만 남겨두고 사라지고 싶다.” 무거운 날에 쓴 시가 “여느 날 문득, 문득이라는 단어만 남겨두고 살아지고 싶다”로 무한정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처절하게 어느 날 사라지고 싶었는데 누가 여느 날도 꿋꿋이 살아지게 했을까. 문득 외에 모든 시간을 당당히 감당하도록 내 운명을 힘차게 바꿔놓았으니 그래, 무혐의, 확실하다.
계간 『한국시학』 2018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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