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일 시인 / 아침 선박
Ⅰ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서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
세수를 일찍 끝낸 여인들은 탄생을 되풀이한 오랜 진통에 땀배인 내의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파이프에 남자들은, 두고 온 시대를 열심히 피워 문다.
Ⅱ 철저한 자유를 부르면서 흐느끼는 심연, 그 움직이는 고요, 가파른 정오의 한 때를. 이해만이 남고, 오직 진행이 있을 때 당황하던 파도를, 식욕을 거느린 별들이 주워 들고 멀리 떠났다. 험한 해협엔, 그러나 의지를 철썩이는 잔잔한 파도의 무료. 밤세워 해변을 지키던 새의 *녹은 남고. 순수의 깊이에서 일어서는 서적들의 눈부신 항변.
―아직 침실에 누워 있는 자들도 한번은 떠날 것이다. 휴식의 때가 오면 패배의 옷자락을 가다듬을 꼭 가다듬을 늙지않는 아우성, 동족을 꺼려하는 쓸쓸한 시선들도 한 번은 떠날 것이다.
Ⅲ 우리에게 주어진 한개의 원인은, 서성이는 곳에 쓰러지지 않는 거만한 거부. 타협이 없는 거리를 글세, 걸어갈 수 있을까?
신앙은 놓이고 길을 가는 의문의 날에 찾아 온 제삼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식탁.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천둥이 울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의 식탁은 없을까?
쟁취의 이빨을 내놓기 전 낮에도 눈이 감긴 암초의 눈을 뜨게 할 순 없을까?
겨울을 빠져나온 꽃들이 찾아가 피어날 꽃나무는 없을까.
계절이 없어 과일들은 익질 못한다.
Ⅳ 획득의 눈이 내리고 있다. 학동들의 꿈길에서 얻어진, 멀고 먼 나라의 가까운 은혜가 흩날리고 있다.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물러 않은 산.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가 되더라도 피로하지 않을 하이얗게 움직이는 선박이 있다.
우리 젊은, 우울한 선장에겐 무엇을 바칠까? 우리의 모국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을, 우리의 눈에 맞는 색깔의, 저 지평을 향해 펄럭일 기를 바쳐야 한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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