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 시인 / 발꿈치
새로 구두를 장만하고 공원을 지나 극장까지 갔다. 한없이 가벼운 햇볕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는데 두꺼운 책에 눌린 진달래처럼 피가 다 빠져나간 멍울이 은근했다. 뒤집어도 다시 돌아왔다. 나는 그곳이 내 몸의 귀양지라 생각했다. 길들여지지 않아서인지 구두에 서리가 돋았다. 구두를 벗고 당신의 옆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나도 당신도 서로에게 길들여질 수 없었던 시절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음을 건너와서 그어진 주름만큼이나 간절했다. 당신과 나는 그 움켜쥔 힘으로 시절을 견뎠던 것일까. 자세히 보니 발꿈치에 백태가 달라붙어 있었다. 백태가 희고 간결하게 피어 있었다.
격월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5~6월호 발표
박성현 시인 / 하드보일드 나다
나다*가 입을 벌리자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진다. 나다는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양탄자, 가죽구두, 세발자전거, 군용 건전지를 토한다.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식도 어디쯤에 커다란 관이 하나 박혀 있다. 나다는 겁에 질려 있다 도시 전체를 뱉어야 할지 모른다. 나다는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고, 나다에게 자신을 증명한다. 이 건물의 출구는 모두 막혀 있다. 나다는 다시 나다에게 말한다; 어떤 춤을 출까? 나다는 흰 장갑을 낀 그림자를 보며, 입속에서 간신히 빨간색 지붕과 안테나, 그리고 안테나 줄에 걸린 까마귀를 토하기 시작한다. 나다는 그제야 깔깔대고 웃는다. 나다는 사무실로 돌아가 서류뭉치가 쌓인 책상 앞에 앉는다. 회전의자가 밤낮없이 빙그르르 돌고 있다. 나다는 의자에 앉는 나다를 보면서, 아까보다 크게, 더 크게 깔깔대며 웃는다.
* nada 스페인어.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뜻.
월간 『현대시』 2016년 6월호 발표
박성현 시인 / 열일곱 개의 나무계단이 있는 집
한쪽 담이 움푹 꺼졌다. 무릎까지 자란 잡초 옆에 새똥이 무례했다. 똥을 눈 새는 기웃거리다 열일곱 개의 나무계단 뒤로 사라졌다. 속초의 무거운 바닷바람을 이고 있는 기와에서 묵은눈이 녹았고 가끔 해가 기우는 곳을 향해 늙은 개가 짖었다. * 날짜 지난 신문을 읽다가 바싹 말라버린 잉크에 코끝을 댄다. 희미한 냄새지만 그곳에 ‘영원’이 있다. * 두툼한 늦겨울 안쪽에 몸을 밀어 넣었다. 내가 읽은 날씨는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렸는데, 혀에 닿을 때마다 나는 몹시 기울어지며 출렁거렸다. 열일곱 개의 나무계단을 밀어내며 잡초가 맹렬히 일어섰다. * 매화가 터지기 직전에는 얼음투성이 손가락도 뜨거운 납을 삼킨 듯 고통스러워진다. 지금 나는 속초의 밤 한 가운데 열일곱 개의 나무계단을 내려와 다시 거대한 해일 꼭대기로 간다. * 잠든 당신 곁에 희고 간결한 새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계간 『시인수첩』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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