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란 시인 / 건축학적 아픔
아픔에 대한 설계를 한 적이 있다. 어제의 상처와 지금의 상처와 내일의 상처가 어둠 사이로 길게 뻗은 채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나무와 벽돌과 콘크리트와 강철이 타협하듯이 바람과 구름과 햇빛이 서로를 빚어 공허 한 채를 완성해가고 있을 때 나는 모퉁이에서 어설픈 슬픔을 깎고 다듬는 중이었다.
상처의 재료는 무엇일까
으뜸이라는 아키텍처는 모든 입들과 가슴을 봉하고 못으로 쾅쾅 박아 시간보다 더 오래 더 많이 견딜 수 있게 하는 것.
힘든 만큼 아름다운 고딕양식처럼
세월을 기반으로 한 지하층은 내구성이 강한 슬픔을 깔고 침묵의 이끼로 미끈거리는 시간은 벽체로 세우며 습지를 넘나드는 마음엔 커다랗게 통창을 낸다.
균열을 앓거나 붕괴되지 않도록 견딜 수 없어하는 것들은 견딜 수 있는 것으로 환기시키고
살고 싶다와 살아가겠다, 를 반복하며 쌓다보면 정말 사는 듯 살아질까? 더 이상 아프지 않거나 아픔을 잊고?
건물을 타고 내리던 비는 흐느낌의 도면으로 줄줄 스며드는데
계간 『문학과 창작』 2018년 여름호 발표
이향란 시인 / 선물
많은 오해를 네게 보낸다. 구부러진 역설과 묘한 아이러니와 맹목에 잠긴 시간을 포장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그대로
충혈 된 눈동자는 눈물로 그렁대고 심장은 요동치며 온몸을 떨겠지만
이럴 수가, 어쩌면 이럴 수가 그렇게 좀 울부짖으라고
귀는 먹먹해져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혈관은 어처구니없는 말들로 꽉 막힐 테지만 그러라고, 바로 그러라고
그 순간 나는 네게 다시 태어나 잃어버린 말들을 네 마른 입술에 앉히고 하나의 얼굴만 아른대는 눈동자와 끝내 버릴 수 없는 목소리로 둥지를 틀 것이다. 네 몸 하나 가득 불 밝힐 것이다.
그리하여 네 생은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은 채 다정히 내게 기울일 것이다.
동인지 『상황문학』제15호 2017년 11월 발표
이향란 시인 / 시계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걸어간다. 긴 머리를 땅에 끌리면서
언제였던가. 그 여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 얼굴 없이 눈 꼬리는 치켜 올라가고 코는 뾰족하며 얇은 입술에는 새빨간 립스틱이 두텁게 덧발라졌던 것 같은
죽음을 모른 채 사는 그녀의 불행을 위해 꽃들은 피어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변화가 없는 그녀의 표정.
꼿꼿한 허리를 피해 태양은 빛나고 달은 미끄러진다. 그림자는 아예 생기지 않는다.
그녀의 뒤축에 걸린 구름은 천둥과 번개와 비를 부르고 바람은 떠돌면서 수많은 사생아와 물고기를 낳는다. 그녀에게 갇힌 바다, 그녀에게 눌려있는 비명, 그녀에게 들러붙은 맥박을 우주라고 교과서엔 표기돼 있다.
세상을 앞지르는 그녀의 뒷심이 여간 질기고 강한 게 아니다. 그녀에게 휩쓸려가는 것들이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보지만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다.
목발을 한 채 또각또각 계속 사라지는 그녀
계간 『문학과 창작』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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