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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서인 시인 / 미끄럼틀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31.

최서인 시인 / 미끄럼틀

 

 

어제 내려왔는데

아직도 내려오는 중이다.

 

계단은 가파르고

비에 젖어 있다, 쇠 냄새를 킁킁거리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누가 내 등을 밀었을까, 내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저녁은 비어있고 늘어진 혓바닥이 매달려 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저녁이 물러간다.

물러가고 물러가서 새까만 바닥이 드러난다, 나는 저리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겠구나.

 

본 적 없는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골목길을 차곡차곡 접으며 끝도 없는 계단을 흘리며 간다.

뒤돌아보고 싶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면 더 뒤돌아보고 싶어지고 친구들을 미워할 수 있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바닥은 깊이를 가지게 되고, 나는 저 구덩이로 빠지겠구나.

 

어제 누군가 속삭였지, 내려가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 없어, 나는

내려가는 바람에 집이 생겨버렸는데,

계속 내려가는 중이라서 자꾸 뭔가 생기는 중인데, 엄마

 

더 열심히 구덩이를 파주세요, 그래 너는 자세나 생각하렴,

점점 아침은 멀어지고 계단은 가팔라진다.

내가 있는데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허리를 세워라, 내려오기 좋은 자세로구나.

 

누가 내 등을 밀었을까, 언젠가는 내려와야 했겠지만

 

배우지 않아도 낮과 밤은 바뀌고 손을 떼면 미끄러지는 것처럼

높이가 부족하면 깊이를 획득한다.

수직으로 이뤄지는 균형을 따라 나는 날마다 태어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최서인 시인

2014년 김유정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현재 문학동인 Volume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