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규 시인 / 저녁의 우체국 앞
그때 문득, 공중 높이 휘장처럼 노을이 펼쳐졌을 때 내가 앞섰던 거 같기도 하고 네가 앞섰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 네가 저만치 앞서 가고 나는 멀찍이서 네 등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저녁의 우체국 앞에서
느린 구름의 행렬들이 공중을 배회하고 있었을 때 너는 식품 가게의 더러운 유리창을 구기며 걸어가고 있었고 살얼음처럼 서늘한 것이 내 목덜미를 스쳤던 거 같기도 하다
그때 문득, 기적소리를 울리며 기차가 강물 위를 지나가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 너는 한쪽 손을 불쑥 들어올리며 지나가는 버스를 세웠던 거 같기도 하다
한 동안 나는 운명에 대해, 그 보편적인 비의에 대해 골똘했지만 때로 방관자적 태도로 연애하고 비뚤어지기도 했다 너와 건넌 편서풍, 그리고 수많은 협곡들, 저녁의 물비늘과 도무지 파란 불이 오지 않는 네거리를 돌아 은박지 구기는 소리를 내며 가끔씩 네가 온다
너는 때로 허구인 채 존재하기도 하지만 너는 시대를 통과하는 슬픈 감성 같은 것이다
삶은 결국, 서사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 갈기를 날리며 한 시대가 달려온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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