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인 시인 / 미끄럼틀
어제 내려왔는데 아직도 내려오는 중이다.
계단은 가파르고 비에 젖어 있다, 쇠 냄새를 킁킁거리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누가 내 등을 밀었을까, 내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저녁은 비어있고 늘어진 혓바닥이 매달려 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저녁이 물러간다. 물러가고 물러가서 새까만 바닥이 드러난다, 나는 저리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겠구나.
본 적 없는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골목길을 차곡차곡 접으며 끝도 없는 계단을 흘리며 간다. 뒤돌아보고 싶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면 더 뒤돌아보고 싶어지고 친구들을 미워할 수 있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바닥은 깊이를 가지게 되고, 나는 저 구덩이로 빠지겠구나.
어제 누군가 속삭였지, 내려가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 없어, 나는 내려가는 바람에 집이 생겨버렸는데, 계속 내려가는 중이라서 자꾸 뭔가 생기는 중인데, 엄마
더 열심히 구덩이를 파주세요, 그래 너는 자세나 생각하렴, 점점 아침은 멀어지고 계단은 가팔라진다. 내가 있는데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허리를 세워라, 내려오기 좋은 자세로구나.
누가 내 등을 밀었을까, 언젠가는 내려와야 했겠지만
배우지 않아도 낮과 밤은 바뀌고 손을 떼면 미끄러지는 것처럼 높이가 부족하면 깊이를 획득한다. 수직으로 이뤄지는 균형을 따라 나는 날마다 태어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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