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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찬옥 시인 / 순백에 갇힌 산책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31.

김찬옥 시인 / 순백에 갇힌 산책

 

 

      새벽이 검은 감옥을 빠져나오자

      간밤에 폭설로 가둔 숲의 문이 열린다

       

      눌러둔 기다림의 현을 새롭게 켤 때,

      순백의 떨림으로 나만의 신화가 시작된다

       

      자연은 활짝 열린 고백성소, 무릎을 꿇지 않고도

      나를 단죄하던 죄의 목록들이 하나 둘 지워진다

       

      칡넝쿨 속에 잠들어있는 어제는 어제 일뿐,

      순결한 페이지를 넘기며 새날의 보폭마다 인장을 찍는다

       

      새의 깃털 하나 침범하지 않은

      설상위에, 나 홀로 선 이 지상이 바로 천상인가

       

      산등성이를 깎아 지은 우리 마을도

      반쯤의 평화를 숲으로 다시 돌려준 듯

      하얀 하늘 보를 쓰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더 이상 감추어둘 것도, 들추고 싶은 것도 없다

      고행의 흔적조차 눈에 띄지 않는

      이런 바탕 위에서라면, 천상의 입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겠다

       

      이 새벽 눈 속을 헤집고 몇 억겁이나 다녀온 것인가

      경계가 지워진 순백의 중심으로 막 다가설 무렵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소우주를 깨운다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본다

      흔들리는 무궁화 기차 칸 사이에 탁발승의 행렬이 잠시 스칠 뿐,

      눈밭에 엮인 발자국은, 나를 들어올리기 위한 행복한 사슬이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김찬옥 시인

전북 부안에서  출생.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가끔은 몸살을 앓고 싶다』, 『물의 지붕』, 『벚꽃 고양이』와 수필집 『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