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옥 시인 / 순백에 갇힌 산책
새벽이 검은 감옥을 빠져나오자 간밤에 폭설로 가둔 숲의 문이 열린다
눌러둔 기다림의 현을 새롭게 켤 때, 순백의 떨림으로 나만의 신화가 시작된다
자연은 활짝 열린 고백성소, 무릎을 꿇지 않고도 나를 단죄하던 죄의 목록들이 하나 둘 지워진다
칡넝쿨 속에 잠들어있는 어제는 어제 일뿐, 순결한 페이지를 넘기며 새날의 보폭마다 인장을 찍는다
새의 깃털 하나 침범하지 않은 설상위에, 나 홀로 선 이 지상이 바로 천상인가
산등성이를 깎아 지은 우리 마을도 반쯤의 평화를 숲으로 다시 돌려준 듯 하얀 하늘 보를 쓰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더 이상 감추어둘 것도, 들추고 싶은 것도 없다 고행의 흔적조차 눈에 띄지 않는 이런 바탕 위에서라면, 천상의 입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겠다
이 새벽 눈 속을 헤집고 몇 억겁이나 다녀온 것인가 경계가 지워진 순백의 중심으로 막 다가설 무렵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소우주를 깨운다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본다 흔들리는 무궁화 기차 칸 사이에 탁발승의 행렬이 잠시 스칠 뿐, 눈밭에 엮인 발자국은, 나를 들어올리기 위한 행복한 사슬이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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