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랑 시인 / 불안한 공중
거미줄을 감추고 있는 거미는 거미가 아니다. 다만 겁 많은 이웃집 고양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담장 뒤로 숨어버리는 이웃집 고양이, 아니다. 거미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은 함정을 숨기고 있다. 함정은 은밀한 계단의 끝에 있다. 나는 그 계단에서 흔들린다. 계단의 끝이 어딘지 몰라 흔들린다. 숲이 고요하다. 거미줄이 없는 숲에 햇살이 무심히 빛난다. 거미줄이 없는 숲의 공중은 불안하다. 불안한 공중은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 안에는 파닥거리는 심장들이 있다. 거미가 거미일 때 생겨 날 덫을 생각하며 방황한다. 그러나 지금 거미는 거미줄을 감추고 있는 거미다. 똑 똑 숲을 두드려 본다. 초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손을 흔들고 거미줄에 고요가 내려앉고 있다. 불안이 없는 불안을 평온이라고 해도 될까. 거미줄이 없는 거미는 거미가 아니다. 조금만 다가가도 담장 뒤로 숨어버리는 겁 많은 이웃집 고양이일 뿐이다. 여기, 애벌레가 회전에 몰두하고 있는 공중이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월호 발표
최영랑 시인 / 집중
선인장을 주시한다.
집중의 자세가 위태로워 보이는 색깔과 온도의 크기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 고여 있다가 실핏줄과 함께 터져나오는 선인장을 주시한다.
선인장은 번진다. 내 잠속으로 내 꿈속으로 선인장보다 나는 먼저 당도할 수 없었다. 내 잠속은 선인장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까 내 잠은 오롯이 선인장의 밤, 꽃들이 떨어진다. 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수직의 자세로 쌓이고 선인장을 둘러싼 풍문이 사방으로 뻗친다.
나는 긴장을 멈추지 않는다.
선인장은 오늘의 표정과 어제의 표정 사이 그늘이거나 모서리 선인장을 생각하는 밤은 시리고 생각 안쪽으로 어두운 발자국이 쌓인다.
그런 집중이 시들 줄 모른다.
가시에 묶여 가시의 감정에 휩싸였던 울타리가 번져간다. 나는 선인장을 악몽이라 믿지 않는다. 판단력은 항상 나 아닌 것들의 기준이기 때문
선인장이 나를 주시한다. 내 몸을 향해 다가오는 선인장을 나는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
그녀가 키우는 선인장이 낯설지 않다.
계간 『미네르바』 2018년 봄호 발표
최영랑 시인 / 카페인
활성도가 높은 밤
내 머리를 떠난 생각들이 백야 속에 서성인다. 엉킨 머리칼처럼 와글와글거린다. 장막을 열어젖히고 배고픈 골목이 어둠을 할키며 건너온다. 그 순간 팜므파탈은 시작된다.
한참동안 나는 그 골목에서 출출해진 허공의 귓속말을 깨문다
내안의 발톱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생각의 반경을 넓힌다
어떤 뒷모습에선 낯선 남자의 끈적이는 등과 허리가 무너지기도 한다
눈을 감아도 도발적인 어둠은 어디론가 밀려가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잔재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곧 탄성을 얻을 것처럼 탱탱해질 것이다.
통증처럼 백야는 아가리를 벌린다. 노골적인 생각이 흩어진 감각들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몸속 가득 팽창되는 중력 발끝마다 서성이는 얼룩의 세계 프릴의 주름처럼 난해해지는 심장의 소란과 정수리에 흐르는 역류성의 감정
남자의 뒷모습을 세워놓고 불협이 증폭된다. 지금은 파열의 시간 그리고 무성해지는 날 것의 시간, 내안에 자라는 파멸을 위해 손톱들이 활성화 되고 있다
계간 『열린시학』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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