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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원 시인 /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5.

이여원 시인 /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을 때

 

 

눈감은 일들이 지나갔지

말의 거품을 입에 묻히고

반갑지 않는 현판식에 갔었지

가가호호들과 입장차들이 연대하여

넓은 마당을 만들고

크고 번잡한 귀를 표방했지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독창적인 패턴이라며 사방 연속무늬를

촘촘하게 채워나갔지

사람들은 환호했고 밤의 장막들로

우리는 서로 모르는 얼굴처럼 행동했지

일식과 월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꼬리가 길어질 때가지

국경선을 긋고 언어들을 섞어 놓았지

 

가끔 우리가 눈 감고 있을 때

눈뜬 우리들이 우리를 빠져나갔지

섭섭한 인사도 없이 우리는 쓸쓸해졌지

감언이설이 통째로 날아다니며

도시와 도시를 건너뛰며

치욕은 가까울수록 지독하고

한 번만 봐줘,

한 번만 눈감아봐

동시대와 같은 입들을 순회했지

 

서로의 거짓말이 기록을 세웠을 때

한 통속의 얼룩임을 알았을 때

태어났을 뿐, 뿌리는 자라지 않았지

모두 우리가 눈 감았을 때나

 

혹은 눈 떴을 때의 일들이었지

 

월간『현대시』 2018년 4월호 발표

 

 


 

 

이여원 시인 / 죽음의 방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말이 묘합니다.

 

같은 이치로 사람의 말

개의 말

그리고 죽음의 말이 있습니다.

 

모든 죽음은 진행 중이므로

개인마다 각자 연재중인 죽음의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말 아주 평범한 말로

첫 장의 죽음,

그 페이지에 실어야 합니다.

 

성장기, 성공기, 극복기 같은 것은 우후죽순이지만

왜 망조(亡兆)기 같은 것은 없을까요.

비록 내가 없는 시대의

실패담이 되겠지만

꼭 필요한 후일담입니다.

 

끝을 살피는 일, 죽음의 말을 놓고

한 반나절 고민 중입니다.

 

수확을 포기한 논바닥 같은

낱말이 줄을 서고

말이 무거워 목이 조금 들어간 흔적도

고민 옆에서 행여 기다립니다.

 

옆집의 새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려

이름을 물어볼까 합니다.

 

월간『현대시』 2018년 4월호 발표

 

 


 

이여원(李如苑) 시인

진주에서 출생.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5년 제16회 시흥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