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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許旻) 시인 / 어떤 장갑 외 1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5.

허민(許旻) 시인 / 어떤 장갑

 

 

테이블 위 포개져 있는 낡은 장갑은

날개를 접고 잠든 지친 한 마리 새처럼

 

당신은 겨울이구나, 아직

 

창밖으로 먼지처럼 쌓여가는

구름의 깃털들

두 개의 날개를 지닌 새들

 

 

두 짝이 하나를 이루는 신의 장갑들

그들이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세상의 끝

시린 밤하늘을 빚고 또 빚었던

먼 꿈들은 어떤 지도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지상에 감춰졌던 자신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눈송이들이 잠시 내려오는 시간이다

 

당신은 아직

겨울일 것이다,

고된 세계의 비행을 마친 채 잠들어 있으므로

 

돌아와 당신은 장갑을 벗는다

당신의 온몸으로

 

나는 벗어놓은

당신의 지친 몸을

굽은 등 뒤에서 잠시 입어볼 밖에

 

날개는 오래도록 낡아있을 것이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 버려진 소원들

 

 

저건 도대체 몇 년 전 던져진 소망일까

버려진 은화들이 가득하다, 밤하늘에

 

머나먼 연못, 깊고 맑지만

돌멩이처럼 던져진 동전들이

바닥에 누워 지난 물결 속을 출렁이는 것

 

왜 우린 주머니 속 동전들을 함부로 버렸던 것일까

 

그렇게 돌아온 환한 방

익숙한 사진을 꺼내 바라보다가,

쓸쓸해지는 계단들

거울의 상처를 닦았지

깊이 깊이 닦을수록 베이는 밤

이루고 싶은 게 없는 것, 같은

오랜 후 겨울에

 

이루고 싶은 게 많았던 오랜 눈빛들을 생각했다

눈을 감으며

 

그렇게 뒤척이다 쓰는

차가운 유리창의 메모가 있어서

고요한 새벽 간신히 문을 열어주었지

 

간절함을 이루지 못해서 주머니 속 은화들을 낭비한 게 아니었듯이

그동안 버려진 소원들을 살기 위해 너와 내가 외로웠다는 것

 

창밖으로 번지는 시린 화살들을 바라보다가

동전의 반짝임이 어느 날 문득

뒤집힌 운명처럼, 뽑혀진 살처럼

잊어버린 길들을 다시 피 흘릴 때

 

이루고 이루었으나

우리가 못 속으로 던져 잃어버린

오래전 처음의 소망들로 인해 쓸쓸해지는 하루를 선사하듯이

 

그럴 때 별들이

출렁이는 눈동자로 우리를

한참 동안 바라봐주듯이

 

계간 『시산맥』 2018년 여름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mail: solitude199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