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許旻) 시인 / 어떤 장갑
테이블 위 포개져 있는 낡은 장갑은 날개를 접고 잠든 지친 한 마리 새처럼
당신은 겨울이구나, 아직
창밖으로 먼지처럼 쌓여가는 구름의 깃털들 두 개의 날개를 지닌 새들
두 짝이 하나를 이루는 신의 장갑들 그들이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세상의 끝 시린 밤하늘을 빚고 또 빚었던 먼 꿈들은 어떤 지도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지상에 감춰졌던 자신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눈송이들이 잠시 내려오는 시간이다
당신은 아직 겨울일 것이다, 고된 세계의 비행을 마친 채 잠들어 있으므로
돌아와 당신은 장갑을 벗는다 당신의 온몸으로
나는 벗어놓은 당신의 지친 몸을 굽은 등 뒤에서 잠시 입어볼 밖에
날개는 오래도록 낡아있을 것이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 버려진 소원들
저건 도대체 몇 년 전 던져진 소망일까 버려진 은화들이 가득하다, 밤하늘에
머나먼 연못, 깊고 맑지만 돌멩이처럼 던져진 동전들이 바닥에 누워 지난 물결 속을 출렁이는 것
왜 우린 주머니 속 동전들을 함부로 버렸던 것일까
그렇게 돌아온 환한 방 익숙한 사진을 꺼내 바라보다가, 쓸쓸해지는 계단들 거울의 상처를 닦았지 깊이 깊이 닦을수록 베이는 밤 이루고 싶은 게 없는 것, 같은 오랜 후 겨울에
이루고 싶은 게 많았던 오랜 눈빛들을 생각했다 눈을 감으며
그렇게 뒤척이다 쓰는 차가운 유리창의 메모가 있어서 고요한 새벽 간신히 문을 열어주었지
간절함을 이루지 못해서 주머니 속 은화들을 낭비한 게 아니었듯이 그동안 버려진 소원들을 살기 위해 너와 내가 외로웠다는 것
창밖으로 번지는 시린 화살들을 바라보다가 동전의 반짝임이 어느 날 문득 뒤집힌 운명처럼, 뽑혀진 살처럼 잊어버린 길들을 다시 피 흘릴 때
이루고 이루었으나 우리가 못 속으로 던져 잃어버린 오래전 처음의 소망들로 인해 쓸쓸해지는 하루를 선사하듯이
그럴 때 별들이 출렁이는 눈동자로 우리를 한참 동안 바라봐주듯이
계간 『시산맥』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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