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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생활 속의 성경] 깨어남

by 파스칼바이런 2021. 12. 18.

[생활 속의 성경] 깨어남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해가 짧아졌다. 아니 어둠이 길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가 싶기도 하다. 이제 새벽 미사 준비를 위해 일어나는 시간에는 햇볕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불을 박찰 때의 무게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보니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 좀처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 달콤하고 보드라운 솜이불의 왕국에서 끝없는 꿈을 꾸고 싶지만, 어제 주일미사를 드렸으니 오늘 새벽 미사를 드려야 한다는 현실 세계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최민순 역 시편 56,9; 참조 새번역 시편 57,9)고 노래한 시편 기자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수금과 비파는 아니더라도 시계와 핸드폰 알람으로 내 영혼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야 멀쩡한 정신으로 새벽 미사를 드릴 수 있을 판이다.

 

아침, 어두웠던 땅에 빛이라는 파도가 서서히 밀려오는 시간이다. 마른 땅에 물이 적셔지듯 죽은 듯한 몸의 감각이 점차 살아나는 때이기도 하다. ‘혼자’에서 ‘여럿’으로 나아가는 이때는 다시 관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시편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 시간에 빗대 묘사한다. 예를 들어 시편 5,4 “주님, 아침에 제 목소리 들어 주시겠기에 아침부터 당신께 청을 올리고 애틋이 기다립니다.”거나 시편 30,6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 가니 저녁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환호하게 되리라.”, 시편 46,6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께서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정의의 순간으로도 아침을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시편 101,8 “나라의 모든 악인들을 아침마다 없애리니 나쁜 짓 하는 자들을 모두 주님의 성읍에서 잘라내기 위함입니다.”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시편에서 아침을 묘사할 때 바탕에 깔린 생각이 있다. ‘어둠으로 인해 무엇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순간’과 ‘빛이 있어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 이 아침에 교차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려움과 믿음의 교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 두려움과 믿음은 인간 마음 안에서 서로 다투는 상반된 감정이다. 처음의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막는 것이라면 다음의 것은 마음을 통하게 해 걸어가게 한다. 하나가 커지면서 다른 하나가 줄어드는데 그 역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면 두려움은 오지 못하고, 두려움이 근처에 있다면 믿음은 멀리 떨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올바르고 분명한 앎에서 기인한다. 믿음은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 오는 까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헤아리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인식하는 데서 오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에 대해 살펴야 한다.

 

복음서에서 두려움과 믿음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구석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이 풍랑을 맞이한 장면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곤히 잠드신 주님과는 반대로 계속해서 어디에 머리를 둬야 하는지 그리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마태 8,18-25 참조).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믿음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하긴 믿음이 충분했다면 제자들은 주님의 허약한 복부에 다리를 올리고 –불경하게도– 드르렁 코를 골며 함께 잠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제자들의 이미지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간 존재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바다를 가르는 배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공동체임을 암시한다. 배 안에 함께 하시는 그분은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바람과 바다가 복종하는 분이다.

 

언제쯤 폭풍우의 배 안에서 주님과 잠들어 심연(深淵)의 신비를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믿음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렇게 잠들고 나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수금과 비파로도 충분히 잠이 깰듯하다.

 

[2021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