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신정민 시인(전주) / 확보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슬픔인가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어떤 속도로 회복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다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처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수 없는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는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겼던 것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발자국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었다
신정민 시인(전주) / 회광반조(回光返照)
저 큰 나무를 선택한 건 벼락이 아니다
쓰러진 줄도 모르고
지난여름 그 산벚나무 꽃을 피웠다
숨 거두시기 전 내 이름 또렷하게 불러주셨던 아버지
벌목공도 마다하는 숲에
해지기 전 잠시 환한 저녁이 찾아와
사력 다해 핀 꽃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있다
몸이 익힌 건 잊히질 않아
넘어지며 들었을 첫 우렛소리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신정민 시인(전주) / 오픈 북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아
다림질의 세 가지 조건은 수분 압력 온도였다
알고 있는 단어를 다 써버린 것처럼 골목 입구 동네 세탁소만 떠올랐다
더 잘 구르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니는 동그라미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음식물에 초파리가 생길 때 필요한 조건들만 생각났다
어느 봄날 주민센터 찾아갈 때 길 가던 세 사람 모두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답이 있다던 힌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도 괜찮은 일
어떤 자료든 참고할 수 있는 생이었는데 달달 외운 조건들, 성적불량자에겐 너무 많았다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었다
신정민 시인(전주) / 젠가
달팽이를 바위에 내려쳐 속살을 빼먹는 것이 발톱인지 부리인지 생각하면서
하루가 몇 개의 단어로 쪼개어져 있는지 생각하면서 블록 더미를 무너뜨리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린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창문 하나 손끝으로 밀어내어 맨 위에 쌓는다
차례를 치른다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경우의 수들이 동원되지만 끝나지 않는 테이블 게임 위에 엇갈려 쌓이는 직각들 한 손만 사용해야 하는 스릴이 있다
누군가의 창문을 오래 바라보는 버릇 그러니까 불안은 건물 한 채를 무너뜨리곤 한다
어두운 불빛들의 곡예
밤 한가운데를 거니는 달갑지 않은 순서 위기를 떠넘겨야 하는 차례는 자주 돌아온다
아주 긴 이야기를 질질 끌며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으로 쌓이는 관계들
우리가 쌓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까지 기껏 세워놓은 것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아이리스 플래티넘 캐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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