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진 시인 / 겉절이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배춧잎처럼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계간 《불교문예》 2022년 가을호-
권상진 시인 / 농담
죽음을,이루다 라는 동사로 의역해 놓고서 그는 떠났다 슬픈 기색은 없었다 이태 전 문병을 간 자리,웃음 띤 얼굴로 비스듬히 누운 채 땅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던 그의 드러난 한쪽 귀는 단풍잎처럼 붉었고 눈이 붉었다 죽음을 이루려는 안간힘이 겨운 웃음을 꽃대처럼 받치고 있었다 가만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었으므로 한참 동안 단풍잎처럼 마음 벌겋게 그를 지키다가 돌아오는 길, 문밖을 따라나서는 희미한 소리 ‘먼저 가 있을게’
바람이 손끝에 침을 발라 시간을 낱장처럼 넘기는 늦은 오후 겨울 앞에 선 단풍나무 한 그루 고통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직면을 본다 꽃 한 다발을 내밀고 싶은 감동적인 결말 앞에 안간힘으로 죽음을 이루려던 그가 떠올라 나는 다시 나무 곁에 한동안 서 있어 주었다 그리고 말 대신 단풍만 간혹 던지는 나무에 답해 주었다 '니가 참 부럽다'
권상진 시인 / 홀로반가사유상
얼굴과 손등에 보풀보풀 녹이 일었다 눈물은 날 때마다 눈 가 주름에 모두 숨겼는데도 마음이 습한 날은 녹물이 꽃문양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오래도록 손때가 타지 않은 저 불상의 응시는 일주문 밖 종일 방문턱을 넘어 오지 않는 기척을 기다리느라 댓돌에 신발 한 켤레는 저물도록 가지런하다
낡은 얼레처럼 숭숭한 품에서는 시간이 연줄보다 빠르게 풀려나갔다 두어 자국 무릎걸음으로 닿을 거리에 아슬하게 세상이 매달려있는 유선전화 한 대 간혹 수화기를 들어 팽팽하게 세상을 당겨 보지만 떠나간 것들은 쉬이 다시 감기지 않는다
몇 날 열려진 녹슨 철 대문 틈으로 아침볕은 마당만 더듬다가 돌아서고 점심엔 바람이 한 번 궁금한 듯 다녀가고 달만 저 혼자 차고 기우는 밤은 꽃잎에 달빛 앉는 소리도 들리겠다
누워서 하는 참선은 하도 오래여서 반듯이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강아지 보살 고양이 보살도 하나 찾지 않아서 한 쪽 다리는 저려서 들어 포개고 한 손은 눈물을 훔치러 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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