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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정민 시인(전주) / 확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0.

제17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신정민 시인(전주) / 확보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슬픔인가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어떤 속도로 회복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다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처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수 없는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는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겼던 것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발자국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었다

 

 


 

 

신정민 시인(전주) / 회광반조(回光返照)

 

 

저 큰 나무를 선택한 건 벼락이 아니다

 

쓰러진 줄도 모르고

 

지난여름 그 산벚나무 꽃을 피웠다

 

숨 거두시기 전 내 이름 또렷하게 불러주셨던 아버지

 

벌목공도 마다하는 숲에

 

해지기 전 잠시 환한 저녁이 찾아와

 

사력 다해 핀 꽃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있다

 

몸이 익힌 건 잊히질 않아

 

넘어지며 들었을 첫 우렛소리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신정민 시인(전주) / 오픈 북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아

 

다림질의 세 가지 조건은 수분 압력 온도였다

 

알고 있는 단어를 다 써버린 것처럼

골목 입구 동네 세탁소만 떠올랐다

 

더 잘 구르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니는 동그라미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음식물에 초파리가 생길 때 필요한 조건들만 생각났다

 

어느 봄날 주민센터 찾아갈 때

길 가던 세 사람 모두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답이 있다던 힌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도 괜찮은 일

 

어떤 자료든 참고할 수 있는 생이었는데

달달 외운 조건들, 성적불량자에겐 너무 많았다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었다

 

 


 

 

신정민 시인(전주) / 젠가

 

 

달팽이를 바위에 내려쳐 속살을 빼먹는 것이

발톱인지 부리인지 생각하면서

 

하루가 몇 개의 단어로 쪼개어져 있는지 생각하면서

블록 더미를 무너뜨리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린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창문 하나 손끝으로 밀어내어 맨 위에 쌓는다

 

차례를 치른다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경우의 수들이 동원되지만

끝나지 않는 테이블 게임 위에 엇갈려 쌓이는 직각들

한 손만 사용해야 하는 스릴이 있다

 

누군가의 창문을 오래 바라보는 버릇 그러니까

불안은 건물 한 채를 무너뜨리곤 한다

 

어두운 불빛들의 곡예

 

밤 한가운데를 거니는 달갑지 않은 순서

위기를 떠넘겨야 하는 차례는 자주 돌아온다

 

아주 긴 이야기를 질질 끌며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으로 쌓이는 관계들

 

우리가 쌓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까지

기껏 세워놓은 것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아이리스 플래티넘 캐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신정민 시인(전주)

1961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2003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꽃들이 딸꾹』(애지, 2008), 『뱀이 된 피아노』가 있음.『작가와 사회』 편집장 역임.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