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수 시인 / 흰 꽃
잠에 들면 어둡고 긴 동굴을 본 사람들만 식사를 끝낸 후의 빈 그릇처럼 깨끗하다 귓속의 애정행각, 그 속에서 전생의 연인을 꺼낸 누군가는 종이학을 접는 사람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동굴을 일으켜 세워 함께 우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동굴을 허물고 그 위에 흰 천을 친친 감은 나무를 식목할 줄도 안다 보리밥을 삼키면 보리밥이 울음을 삼키면 울음이 마중 나오는 낯 붉은 허물처럼 잦은 심호흡에 눈이 사라지려 한다 입을 틀어막으면 우는 사람은 잠시 동안 망설이다 다시 우는 사람이었다 혼자 남은 사람은 걸터앉은 문턱조차도 아궁이 속에 던져진 일기(日記) 같아서 죽은 나무보다 더 검은색으로 몸을 한 바퀴 더 비튼 자세로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열 살의 나이에는 열 살의, 스무 살의 나이에는 스무 살의 상처가 생기더니 상처가 아닌 것처럼 몸 이곳저곳에서 옅은 물기가 새어나온다 흉터 속의 사람에게 가진 손을 나눠준다 가장 먼저 죽은 나무가 봄날을 밀어올린 물관처럼 말라있다 유적 같기도 감옥 같기도 한 동굴 속에서 신의 식사 장면은 생년월일이 전혀 다른 어둠으로 그려진다 상처를 가장 쉽게 알리는 일은 흉터를 보여주는 일이라며 내 몸에 구멍이 생기더니 살과 뼈가 빠져나간 잠의 가장 긴 토막에서 흰색으로 자란 나무가 검은색으로 넘어진다 먹빛으로 다년생 꽃들이 자라고 있다 ‘내가 무지한 탓입니다’ 어떤 꽃은 필 때부터 질 때까지 흰 꽃이었다
박병수 시인 / 도배공을 기다리며
벽에 숲을 그려놓아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범칙한 죄수의 방, 벽면마다 혀가 말라붙어 있다 슬픔을 잘라먹는 유형의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태어나 창문은 가린 것이다 왜소증을 앓는 이마에는 딱한 뿔을 자랐다 뿔은 무수한 깊은 잠을 무찌르고 숲을 헤매는 수형자는 그의 밤이 죽어 버린 후에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어떤 그림을 그려놓아도 찢어지거나 젖어있는 종이의 가여움, 벽지에 얼굴들을 그렸을 때 유일한 고마움은 똑같은 모양으로 희미해져 의미를 잃은 것, 식탁에 앉아 잘 익힌 생선에게 네 잘못이라고 중얼거린 혼잣말은 불순했었다 “캄캄한 숲속에서 한숨을 쉬는 자 누구요?” 이 질문은 숲에 들어 율객으로 머무른다 세계는 작은 알전구와도 멀어졌다 사흘 동안 걸어가도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내 슬픔의 아홉 번째 영토, 도배공은 방안을 자기의 소유인 것처럼 밤새 걸어 다녔다
- 2021년 계간<시인정신>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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