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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산 시인 / 입춘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

이미산 시인 / 입춘

 

 

먼 길 오는 동안 가느다란 빛으로 갈라진

손가락 열한 개

손가락 삼천삼백 개

손가락 칠천칠백만 개

 

오로라 지나 오존층 지나

베란다에 도착한다 잡히는 대로 어여쁘게 문지르고

어여쁘게 두드리는

반짝반짝 우주의 실핏줄

 

사랑초가 혀를 쏙 내밀고 시작하려는 이야기

먼지를 쓴 채 내 지하실에 잠들어있는, 이를테면

업힌 나를 깍지 낀 손으로 받치며 들려주던 노래

등의 울림과 번지는 목소리의 신비한 화음 따라

아주 먼 곳으로 나를 이끌던 그 자장가

그날처럼 내 이마 쓸어내리는 손가락들의 속삭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내가 잠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 부드럽고 다정하고 끈질긴

마침내 손의 나라에 도착한 나는

온몸에 꽃이 피어난 초여름의 원피스 깨금발로 거닐며 아무나 붙

잡고

차 한 잔 하실래요?

 

내가 즐거울수록 더 가늘어지는 손가락들

가끔은 웃는 태양 쪽으로 돌아서서

딸꾹

딸꾹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이미산 시인

1959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저기, 분홍』 『궁금했던 모든 당신』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