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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업 시인 / 전신마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4.

김희업 시인 / 전신마취

 

 

흰옷 입은 사내가

달콤한 잠옷을 내게 건네 주었어

그걸 채 입기도 전에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무아의 경지였어

그렇다고 꿈을 꾸는 건 절대 아니야

어떠한 꿈도 내게는 사치에 불과해

사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꿈불감증을 앓고 있어

빠르게 도망가는 잠을 놓치지 않겠어

잠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죽음의 국경선에 놓인 잠의 나라에 쉽게 도달할 수 있어

내가 잠을 자든 잠이 나를 재우든 상관없어

가난한 영혼은 나보다 먼저 잠들어 있을 테니

내 몸을 탐하거라 암울한 사자使者여

반납하고 싶어 안달하는

내 것이 아닌 내 몸을 가져가시라

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새롭게 태어나겠어

마취의 눈꺼풀이 열리자

없어진 머리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어

오오 악몽 같은 낡은 세계여

낯선 나는 왜 여기에 버젓이 있는가

곁에 나란히 누웠던

실패한 죽음을 비웃으며

나는 혀를 끌끌 찼어

 

회복실의 불빛, 내 몸 훑어

차례차례 잠의 옷을 벗기고 있었어

거기 또 다른 내가 있었어

 

 


 

 

김희업 시인 / 버려지는 세계

 

 

자신도 모르게 얼음이 물로부터 서서히 버려지고 있었다

 

어디든

기대어 사는 벌레들은

자신을 노출한, 누를 끼쳤다

 

또 한 차례 밤이 지나갔으며

살아가는 동안 밤이 모일 생각을 하니, 사나운 어둠도 모처럼 든든했다

 

꽃을 꺾고 나서 그 꽃이 온전히 피길 바라는 사람을 탓하랴

시든 꽃을 탓하랴

 

눈에서 멀어진 것들은 버려졌거나 버려지고 있는 중

 

먹다 버린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개미 떼가 핥는다

아직은 희망적인가, 아주 버려지지 않아서

 

떠도는 개처럼 누굴 기다리는 표정으로

아이가 뒤돌아보고 있다 자전거 바퀴의 둥근 순환 곁에서

 

밤으로부터 낮은 항상 떨어져 지낸다

밤하늘 별똥별이 자취를 감추게 되면

하늘은 단지 하늘만을 남겨 둔다 적막이란 친근한 여운을

지금은 밤이 버려진 지 오랜 아침이고

 

혼자의 시간을 뒹굴뒹굴 견디고 있을 푸른 눈의 인형을 위하여

인형의 집으로

귀가를 서두르는 소녀

 

생을 버린 사람을 찾겠다고

잃었다는 말은 멀어진다는 말

후회와 저주 그 어디쯤 버려져 있을 그

 

 


 

 

김희업 시인 / 닭발

 

 

새벽잠을 깨운 죄과가 저리 큰가

털 몽땅 털리고

공포에 소름 돋은 닭

먹이를 쪼아 일평생 먹여 살리던 주둥이

밥그릇 내동댕이치듯

바닥으로 던져졌다

발의 때를 한 층 벗겨내는 닭집 주인

지친 발의 수고로움 덜어주는 심정으로

발을 자르자

닭들의 길이 끊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복잡해진 도마의 손금

저 나무는 죽어서도 죽음을 피할 길 없구나

냉장고의 닭들은 닭발만 보인다

그러므로 저들은 정직한 죽음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포장된 비닐 속에 밀폐된 많은 걸음

짝짓기 힘든 고만고만한 발들

오늘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나는 나를 부인할 것이다

혹시

오리발을 닭발로 잘못 본 게 아닌지

 

 


 

김희업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칼 회고전』(천년의시작, 2009), 『비의 목록』이 있음. 천상병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