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향란 시인 / 생각의 말
한 바구니 가득한 잘 익은 석류 받아 들고 붉은 틈에 정박한 하얀 시절 만나고 있네요 마당가 허물어 깊은 협곡 스스로 만들어 놓고 당연히, 손 놓은 쪽이 아버지라고 꽃다운 젊은 여자 만났으니 끌어주는 이 없다고 홀로 길 잃은 바람이 되었겠지요
오래도록 내 안에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 서로를 밀어내는 게 운명인체 그 만큼 더 멀어진 남겨진 사람들 가슴 후벼 파는 말 서로 직접 한 적 없지만 생각의 말이란 입 밖에 내뱉지 않아도 상처에 덧을 내고 지독한 긴 겨울이 되어 서로의 등만을 보게 했지요 미련한 시간아,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기도한 몇몇 밤 설마 없었겠습니까? 그냥 살짝 벌렸을 뿐인데 아이고, 눈물 별 쏟아지네요 서둘러 허우적허우적 쓸어 담는데 마른 손 마디마디 손톱 끝까지 선홍빛 눈물 고였어요 당신 어쩌면 저 나무를 쭉 사랑하고 있었나요?
놓쳤던 시간도 내 몫, 한 알 한 알 죄다 씹어 먹는데 듣지 못했던 생각의 말이 눈물로 주렁주렁 핍니다
최향란 시인 / 고래
들린다. 지구에서 가장 커다란 몸. 점점 작아지는 소리 파도는 빈 영혼까지도 집어 삼킬 듯 아가리 사납게 벌리고. 참 멀다 멀어. 점점 뻗쳐오는 아가리, 긴 유선의 몸 틀어 가장 크고 높은 호흡을 조율하라. 턱 밑으로 흐르는 수염 흔들어 무더기로 쏟아지는 플랑크톤 끝없이 빨아들이며 너의 푸른 회색 등줄기 보여주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깜깜한 소리의 길 더듬는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노래는, 그 후로도 보이지 않았다.
최향란 시인 / 꼭꼭 숨어라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본다-
안도, 어디로 가야하나 켜켜이 뼈를 포갠 사람들. 호랑이 탈을 쓴 가짜를 만나 피로 물든 섬. 저것, 거짓 탈의 손가락질에 죄 아닌 죄로 즉결심판 받아 찢겨진 살. 두려움 깊고 깊어 감히 떨지도 못하고 눈빛만 흔들리다가 그 많은 목숨 순식간에 사라진다. 저승으로 가는 치 떨린 영혼, 진혼곡은 없다. 결국 영원조차 부수어지고 피로 물들어 붉은, 그렇게 아픈 세월 있었다.
오늘 붉은 섬으로 간다. 지금 바다에 조기떼 들어오고, 이야포에 조국의 태극기는 그 날처럼 펄럭이는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그리운 사람아 꼭꼭 숨어, 바람을 타고 이야포로 들어오시오. 좀 더 거칠고 보다 질기게 독 오른 야수의 눈에 띄지 않게 창백한 생 꼿꼿하게 무리 이루어 이야포 돌 틈 보랏빛 갯무로 피어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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